‘관광책자에도 없는 아테네 카페거리를 발견하다'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는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나온다. 처음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행운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아테네를 이제 막 여행하려는 내게도 이 초심자의 행운이 따랐다. 무계획으로 여행의 첫 날을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의 진짜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관광을 했기 때문이다.
1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바로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푼 나는 여독을 잠시 풀며 오늘의 일정을 점검했다. 오늘 저녁엔 에어비엔비에서 찾은 아테네 나이트 투어에 가야 했고, 그전에 유적 및 다양한 미술품을 소유한 바네키 미술관을 가는 것이 중심 일정이었다. 그리고 내일 낮 1시엔 산토리니로 떠나야 하는 일정이다. 그러므로 아테네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날은 오늘 하루뿐이었다.
저녁 일정 전의 그 시간을 나는 유용하게 써야 했다. 이에 나는 관광책자에 나와있는 여행지를 둘러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관광책에서는 아테네의 대표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나 모나스티라키 광장 주변 시장을 추천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나는 과감하게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에 숙소로 오면서 눈여겨봤던 그 아테네의 뒷골목스러운 미지의 곳을 탐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여행을 몇 번 다녀보면서 생긴 나의 명확한 지론 때문이었다. 관광책자에 있는, 그 여행지 하면 떠오르는 곳을 가면 기대하던 것 그대로를 보게 되지만 초심자의 행운에 발걸음을 맡기면 기대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파리의 에펠타워나 몽마르트 언덕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 그곳으로 찾아 떠나는 길 골목골목을 더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그 덕에 관광책자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던 벼룩시장을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고, 중고물품을 파는 가게들을 우연히 만나 평생 기억에 남을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내가 택한 것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아닌 골목골목으로 닿는 나의 발이었다.
내가 묵은 숙소는 아테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모나스티라키 광장의 정확히 맞은편 대로변에 있었으므로 관광지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래서 관광책자에도, 여행 블로거들이 언급하지도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에어비엔비 호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골목은 카페거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숙소를 이곳에 묵은 덕분에 책자에도 없는 곳을 탐험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곳이 어쩌면 아테네의 유적보다 더 보물 같은 하루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설렘을 안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숙소 밖을 나와 호스트가 알려준 광장으로 나가자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테이블들이 바깥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나온 햇살을 즐기기 위해 저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카페 밖에 나와 있었다.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 시월의 토요일 오후는 당장에 닥쳐올 어떤 위기는 없는 것처럼 한가로웠다.
골목을 거닐자 시끄러운 그리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때마침 찾아온 반가운 햇살 따라 그들은 야외 테라스에 앉아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으며 사람들은 활기찼다. 아무도 몇 년 전 그리스를 강타했던 대공황이라던지, 국가 부도라던지에 속박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다름없었다.
기념품을 사기 위해 골목 여기저기를 누볐다. 카페가 모여있는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골목골목을 누볐다. 길을 걷던 중 코너에서 누군가의 기타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기타 음악과 연자주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은은하게 아직도 아침잠에서 깨지 못한 누군가를 조심스럽게 깨우고 있었다.
국가 부도를 직면해 어두울 그들의 얼굴, 셔터가 내린 체 황량한 상점들. 떠나기 전 내 머릿속의 그리스는 그랬다. 몇 년 전 전 세계에 충격을 몰고 온 국가 부도의 나라이자, 그리스를 다녀온 엄마에겐 돈벌이보다 자신들의 점심시간이 더 소중한 그리스인들의 영업 태도 등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황량한 거리를 상상하고 왔던 나에겐 그 누구보다 활기차고 아름다운 모습의 아테네는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은 유럽 다른 국가들에게도 쉽게 느끼지 못해 본 여유였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가져온 책을 읽고, 자신의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신이 축복하는 그 지중해의 온화한 햇살을 받는 그들의 모습을 표현하자면 마치 오늘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오늘의 하루를 즐기고 있었고,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그 시간을 무엇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군가는 당장의 생계가 어려울 수도, 원하는 직장을 갖지 못해 두려울 수도, 연인과의 관계가 소홀해져 외로운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그것은 미래의 일이지 지금의 고민은 아니야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을지 몰라도 풍족한 자연의 모든 것을 누리며 담소를 나누는 그들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는 작가 본인이자 소설 속 주인공인 카잔차키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목, 내일 일일랑 내일에 맡기고 지금, 현재 눈앞에 있는 당신의 현재에 주목하시오.’
조르바는 미래의 일을 앞서서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지금 눈 앞에 키스할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그 연인과의 키스에 집중했다. 연인과 언젠가는 헤어지지 않을까, 지금은 이렇게 행복하지만 당장 내일 일거리가 없으면 어쩌지 같은 사소한 걱정들이 조르바에겐 없었다. 조르바에겐 춤을 출 수 있는 두 팔 두 다리가 있는 지금, 흘러나오는 음악,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있는 현재가 있다면 그 무엇도 걱정할 거리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며 환한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리스인들은 모두 저마다의 조르바를 품에 안고 있어 보였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쩌면 그들에게는 당장의 밥벌이, 미래에 대한 궁리, 그런 것들이 큰 고민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현재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들의 조르바적 분위기에 취해 토요일 오후의 햇살을 만끽했다. 지금 내 눈앞에는 당장 빠져나갈 카드값, 회사에서의 상사와의 사소한 갈등, 내가 욕심내던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 연인과의 어그러진 관계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지금 내 눈에 있는 것은 그리스의 햇살, 풍부한 자연이 주는 맛있는 먹거리, 그리고 어제, 오늘, 내일 최대한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를 최대한으로 만끽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한국에서의 사사로운 걱정들은 서서히 잊혀 갔고, 나는 어느새 그들과 어울려져 그리스인 모드로 현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수십 년 전의 조르바가 맞이했을 그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생의 행복은 어쩌면 미래를 궁리하는 것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