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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Jan 26. 2020

낙법의 미학

영화 <마카담 스토리>를 보고


 번지점프를 해보신 적 있나요? 그 스릴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지만 저는 억지로 스릴을 즐길만한 위인은 못 되는지라 번지 대에 서 본 적도 없습니다. 번지점프를 해보셨거나 친구가 하는 것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뛰는 장면 자체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중력을 지렛대 삼아 아래로 하강하고, 줄에 끌어 당겨져 다시 상승하고 하강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 그리고 최후에는 줄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지요.


 모든 추락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번지점프야 ‘줄’이라는 것이 붙잡아주지만 인생에서는 지지대가 없는 추락은 정말 볼품없습니다. 더군다나 높이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상실감과 초라함은 배가 됩니다. 전교 5등 하던 친구가 10등 하는 것과 전교 1등 하는 친구가 10등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천지 차이입니다. 같은 10등인데 우리는 1등이었던 친구의 이야기를 가십 삼아 이야기하고, 선생님은 1등 친구를 더 나무라고, 다시 1등을 되찾으라고 격려해 줍니다. 추락한다는 것, 원래 있던 자리에서 더 볼품없어진다는 것은 정말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일 겁니다.


 작년 말 크리스마스 때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프랑스 영화 <마카담스토리>입니다. 공동 연립주택에서 벌어지는 세 쌍의 남녀에 관한 옴니버스식 이야기입니다. 사랑에 대한 주제 외에도 모성애와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골고루 담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는 제각각 어딘가에서부터 <불시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동 연립주택 2층에 사는 40대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엘리베이터 수리 비용 부담을 거절합니다. 그러다가 다리에 문제가 생겨 졸지에 휠체어를 타게 됩니다. 그리고 이웃의 눈을 피해 새벽에 몰래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와 함께 추락합니다. 

 하늘 높이 떠 있던 별 같은 존재에서 졸지에 땅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배우 잔입니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한때 잘 나갔던’ 영화배우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지구 밖 우주에서 엉뚱한 곳으로 불시착한 남자도 있습니다. 우주기지에서 탐사선의 착륙 지점을 잘못 전달받아 이 공동 연립주택 옥상에 떨어진 비행사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원래 위치에서 한 단계 떨어진 존재들입니다.



 그와 반대로 이미 추락해 있던 사람들도 나옵니다. 앞서 소개한 인물들의 상대역들이죠. 휠체어 남이 새벽에 유일하게 음식을 판매하는 병원 ‘자판기’를 찾다가 우연히 만난 노처녀 간호사. 그녀는 야간근무만 서는 간호사입니다. 지저분하고 많이 닳은 병원복을 보니 일에는 애착이 없어 보입니다. 그녀에겐 환자들의 취침시간을 틈타 병동 밖 1층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유일한 휴식입니다. 그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여행을 가는 것이 평생의 소원입니다. 


 ‘한때 잘 나갔던’ 영화배우의 앞집에는 샬롯이라는 10대 남자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편모 가정에서 자라는 샬롯은 언제나 바쁜 엄마와 사느라 끼니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합니다. 소위 관심이 필요한 가정의 청소년입니다. 그리고 불시착한 비행사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신세를 지게 된 늙은 여인은 유일한 가족인 아들이 교도소를 들락날락합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스페인 통속극을 보며 주말을 보내는 것입니다.



 마카담 스토리에 나오는 여섯 인물은 모두 멋지지 않은 꾀죄죄한 사람들입니다. 영화는 멋진 수트도 없고, 사치를 즐길 여유도 없습니다. 그날의 생존만이 이들의 관심사며, 미래보다 과거의 부귀를 방패 삼아 오늘을 이겨내기도 합니다. 


 마카담스토리의 인생사처럼 우리의 현재 삶도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거의 다 올라왔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추락해 있기를 반복합니다. 최선을 다해 회사에 헌신해도 왜 인사고과는 제멋대로 평가되며, 공부에 매진했지만 왜 늘 시험 결과는 그대로인지. 내가 투자한 주식만 왜 자꾸 떨어지는지. 내 배 아파 낳은 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왜 매번 사고만 치는지. 지금의 삶을 한탄하며 지금보다 더 올라갈 구멍이 없는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영화 속 여섯 남녀의 이야기는 특별한 어떤 사건이 벌어지지도, 무언가를 이뤄내지도 않습니다. 다만 서로 덕분에 한바탕 웃고 용기를 얻어 내일을 준비할 뿐입니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애써 꾸며낸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애써 우울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시착>한 현재를 즐기고 거기서 또 다른 <행복>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는 때론 너무 멋진 것들에 현혹되어 평범하고 초라한 것들의 가치를 잊고 지낼지도 모릅니다. 학교에선 멋진 수사와 역사적 위용이 있는 시를 낭독하라는 명령만 받았지, 내가 쓴 오늘의 일기를 낭독하라고 요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진짜 인생은 멋진 시나 문학이 아닌 지구라는 별에 불시착한 우리가 천천히 적응하는 어제, 오늘, 내일에 있지 않을까요. 


 마카담스토리의 여섯 인물의 삶을 낭독해봅니다. 화려함은 없지만 웃음이 있습니다. 나의 삶도 제법 멋지게 떨어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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