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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Feb 14. 2021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탄생한 미코노스

미코노스 여행을 시작하며

 아테네에서 출발해 미코노스 섬으로 향하는 비행기 탑승객은 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였다. 여름휴가철이었으면 사람들로 빽빽했겠지만 지금은 듬성듬성 빈자리가 대부분이었다. 수화물 분실로 악명이 자자한 올림픽 항공을 탄지라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몇 없는 승객을 태우고도 예정된 시간에 오차 없이 이륙 준비를 하는 그리스인 답지 않은 프로다운 모습에 항공사에 대한 호감도가 크게 상승했다. 각 맞춰 정갈하게 정돈된 검은색 시트가 주는 안정감이나 지금까지 이용한 타 그리스 국내선 항공사와는 다르게 다과와 음료를 챙겨준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사람이 없어 다소 썰렁한 분위기라는 것만 빼면 꽤 만족스러운 비행이었다. 


미코노스행 비행기는 세네 명의 승객을 태운 채 출발했다


 여행객의 발걸음이 뜸한 이유가 미코노스가 인기 없는 여행지여서는 아니다. 대표적인 그리스 여행지 산토리니 보다 두 배 정도 작은 크기의 미코노스는 실은 유럽 여행객에겐 꽤 인기 있는 여행지다. 산토리니와 미코노스 둘 다 포카리스웨트 광고로 연상되는 하얀 골목길로 유명한데 , 산토리니가 신혼부부들이 찾는 로맨틱한 여행지라면, 미코노스는 젊은 여행객들을 위한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객은 1년 365일 불이 꺼지지 않는 해변가 클럽 파티를 즐기려는 혈기왕성한 배낭 여행객 파와 초호화 리조트에서 휴양을 하려는 럭셔리 파 두 부류로 크게 나뉜다. 100 제곱미터가 조금 넘는 작은 섬 한쪽 면엔 고급스러운 리조트가 줄줄이 사탕처럼 뽐내듯 줄 서 있고, 그보다 아래쪽인 남쪽 해안에는 크고 작은 해변을 따라 형성된 비치 클럽이 수십 개 씩 포진해 있다. 그러나 이런 광경도 성수기인 여름 때나 가능한 것이고 지금 같은 비수기인 11월 즈음이면 미코노스는 다른 세상이 된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휴양지의 섬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한철 장사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와 있던 미코노스 인들도 모두 이 섬을 떠나 아테네가 있는 그리스 본토로 뿔뿔이 흩어진다. 미코노스는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는 다소 초라한 여행지가 된다.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지는 비수기에 산토리니와 크레타 섬을 거쳐 미코노스를 최종 목적지로 결정한 데에는 한 가지 이유였다.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를 쓴 곳이니까. 


 어두운 기내 창 밖으로 멀리 미코노스 해변이 보였다. 창 밖은 어느새 땅 꺼미 진 밤이었다. 해변가에 수놓아진 작은 주황빛 점들이 창문을 투과해 눈에 박혔다. 그 불빛이 하도 희미해 지금 우리가 미코노스 상공에 떠 있다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미코노스 섬에서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절반을 썼다. 이 시절에 대한 기록은 그의 책 <먼 북소리>에 상세히 기록돼 있는데, 그가 묘사한 미코노스는 난폭하고 불친절한 모습뿐이다. 그가 미코노스 시절 머문 아파트 관리인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했으며 일기예보를 빗나간 예측 불허의 폭풍우가 매일 밤낮으로 몰아 쳤다. 포카리스웨트 광고 속 청량한 그리스를 기대하고 미코노스에 도착한 하루키는 해가 전혀 들지 않는 음침한 아파트에 틀어박혀 휴양지 생활과는 정반대인 지루할 정도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글을 쓰고 저녁을 먹고 일찍 잠드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상실의 시대>는 하루키를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황량함마저 감도는 창 밖 풍경에 하루키가 묘사한 불친절한 도시 미코노스가 묘하게 겹쳐져 보이기 시작했다. 


미코노스 하니아 항구 풍차. 항구에 부서지는 파도가 거칠다
미코노스 리틀 베니스 풍경. 하루키의 책 <먼 북소리>의 미코노스와 닮아있다



 착륙을 준비하며 낮게 비행하며 하강하는 비행기 밖 풍경을 관찰하다 이내 손에 쥔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페이지를 넘겼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출판사 문학동네 <중국행 슬로보트>였다. 그리스를 여행하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하루키의 책을 읽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에서 챙겨 온 하루키의 여러 단편집 중 하나였다. 그중에는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이 수록된 동 출판사의 <빵가게 재습격>이 있었지만, 그리스를 가장 강렬하게 추억할 책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이 <중국행 슬로보트>였다. 이 책에는 진짜 그리스인의 서명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시작은 불과 몇 시간 전, 크레타 섬에서 미코노를 가기 위해 아테네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의 누군가가 내게 불쑥 말을 걸어 오면서 시작됐다.   


 알 유 어 코리안? 캔 아이 겟 유어 시그니처?

 내게 한국인이냐고 묻던 옆자리의 한 여성이 불쑥 내게 싸인을 요청해왔다. 당황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며 싸인을 요청하는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본인은 아테네 소재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데, 휴가 차 크레타를 여행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자신의 반 제자들이 요즘 열광하는 것이 다름 아닌 BTS이며,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에 아이들이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어서, 자신이 이번 휴가 때 옆자리 승객이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면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한국인을 만났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사인을 해달라는 것이 요였다. 상황을 듣고 보니 나의 싸인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반 모두가 좋아할 일이라면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회사에서 결재 서류에나 쓰던 초라한 싸인을 유명 한류 스타라도 된 것처럼 그녀가 준 종이에 휘갈겼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서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별다른 노력 없이 거저 얻은 왕관을 아주 잠시 빌려 쓴 기분이랄까. 이것이 금수저보단 못하지만 케이 수저쯤은 되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메일 주소를 줄 테니 혹시 나중에 또 그리스에 오게 된다면 자신에게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마땅한 종이가 없던 나는 내가 갖고 있던 책을 불쑥 내밀었고, 앞장에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그 서명이 담긴 책이 하루키의 <중국행 슬로 보트>였다. 


 그녀가 한국에 오는 날, 혹은 내가 다시 아테네를 오는 날을 시리며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다. 한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서로 대화조차 나누지 않은 채 의뭉스러운 얼굴로 서로에 대해 추측만 하다 헤어졌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만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혜택이다. 나는 세계 어딜 가도 내가 그 한국에서 온 사람이다 으스댈 수 있도록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나 BTS의 인기가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랬다. ARMY인 우리 엄마를 위해서도 말이다. 


<중국행 슬로보트>에 각인된 작은 추억



 낮에 출발한 비행기는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도착했다. 간단한 수속 절차를 밟고 무사히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미코노스의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일층으로 된 작은 규모의 미코노스 공항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 뒤로 서서히 해 지는 미코노스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 공항이 언제 지어졌는지 아는 바는 없지만 이 공간에서 당시의 하루키도 나처럼 이 공항을 스쳤을지 모른다. 휴가 시즌을 한참 벗어나 황량함마저 감도는 미코노스에서 하루키가 느꼈을 쓸쓸함을 나 또한 수십 년이 지나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미코노스의 공항을 쳐다보는데 언젠가 오늘을 역사적인 날로 기억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수기가 가장 아름다운 미코노스섬에서, 하루키조차 질색팔색했던 이 미코노스의 비수기에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언젠가 하루키나 BTS처럼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해 지는 비수기의 미코노스를, 이 공항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휴대폰을 들었다. 


미코노스 공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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