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LETO를 만난 한달 뒤 그리스의 LETO를 만나다
빅토르 최의 여름(LETO)과 그리스의 여름(LETO)
그리스 미코노스 섬에 머물 때 나는 ‘레토’라는 이름의 호텔에 머물렀다. 레토(Leto)는, 러시아어로 여름을 뜻한다. 이 호텔 역시 여름을 의도하고 작명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코노스는 대표적 여름 휴양지니까, 하고 나는 추측할 뿐이다.
레토의 러시아 어원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 영화 ‘레토’를 봤기 때문이었다. ‘레토’는 러시아 영화로, 한국인이자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얻은 아티스트 빅토르 최의 생애를 그린 영화다. 한국 배우 유태오가 캐스팅되면서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었는데, 여름이라는 영화 타이틀답게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 빅토르 최는 뜨겁게 사랑하고, 좌절하고, 무너지고, 다시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여름이, 뜨거운 햇빛에 고스란히 타버리는 청춘이, 그리고 빅토르 최의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러나 영화 레토와 미코노스의 레토는 상반된 분위기다.
레토 호텔에 도착하다
레토 호텔은 여름의 정열적인 분위기 보단 겨울의 풍경처럼 쓸쓸하고 왜소해 보였다. 비단 성수기를 한참 지난 11월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런 느낌이었다. 밤 비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레토 호텔에 도착했을 때, 2층 정도의 얕은 구조의 호텔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휴양지 호텔이 이 정도 규모로 장사가 되는 건가 싶었다. 최첨단과 초고층을 선호하는 요즘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것이 이 호텔의 운영 방식 같았다. 최신이라는 단어보다 클래식이 어울리는 분위기.
호텔 로비로 들어가기 위해선 길게 난 정원을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벌써 땅 꺼미 진 늦은 저녁이었고, 어둑한 길목에 주황빛 야외 전등이 간신히 돌길을 비추고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정원을 지나는데 암흑 속에서 야자수 나무가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샤샤샥- 하고. 캄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머릿속엔 이 정원이 품고 있는 유일한 여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시간이 멈춘 듯한 레토 호텔의 로비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흰 벽돌로 만든 인테리어 내부에 황금빛 조명이 은은하게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텅 빈 공간에 투숙객이나 직원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불빛만 열심히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어 리셉션 데스크 위 올려져 있던 영화에서나 보던 고풍스러운 황금 벨을 눌렀다. 그제야 안쪽 공간에서 중후한 지배인이 나왔다. 매우 느린 속도의 걸음 걸이었다. 손님이 있던 없던 그건 자신의 상관이 아니라는 듯 구는 무심하고 느긋한 태도였다. 지구 종말이 눈 앞에 다가와도 절대 그 속도를 빠르게 할 것 같지 않은 일관된 태도였다. 그는 마치 나를 꽤 오래전부터 기다린 사람처럼 서두르거나 헤매지 않고 체크인 절차를 밟았다. 예약자들의 예약정보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파일을 그가 펼쳤고, 서류는 달랑 몇 장 없었다.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자 시스템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없어 보였다. 오로지 수기로, 모든 예약이 관리되는 것이다. 내 예약 정보가 담긴 서류를 빼지 서류가 비었고, 그것은 내가 이곳의 마지막 손님이라는 것을 뜻했다.
지배인이 느린 속도로 내 여권을 복사하고 몇 가지 정보를 적는 동안 나는 호텔을 둘러봤다. 리조트는 애초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겠다는 욕심을 배제한 채 지어진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필요한 만큼, 계획된 인원만 이곳에 머물 수 있다는 인상이었다. 식당 테이블 수는 많아 봤자 서른 테이블이 넘지 않아 보였고 이미 영업을 종료한 구석에 자리한 바는 많이 앉아봐야 열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휴양지의 호텔이 이토록 적막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이 호텔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성수기를 한참 지난 리조트는 적막함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폭발적인 인기를 한 차례 겪고 하락세를 겪고 있는 트로트 가수를 연상케 했다.
미코노스의 여름을 만나다
다른 직원은 모두 퇴근했는지 지배인이 손수 내 짐을 들고 방으로 안내했다. 여자 한 명 여행하는 것 치고 제법 무게가 나가던 내 케리어를 들고 과묵하게 나아갔다. 이층에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선 계단을 두 번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는데, 엘리베이터나 투숙객의 편의를 위해 설치할법한 자동 시스템이 없는 모습이 최첨단을 자랑하는 다른 호텔들과 달리 이곳엔 그런 흉물스러운 기술은 취급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보였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소파 등 휴게 공간이 마련돼 있었지만 저녁 이 곧 시작될 무렵임에도 불빛은 켜져 있지 않았다.
안내된 방은 작고 좁았다. 문을 열자 왼편에 바로 화장실이 있었고, 바로 침대가 보이는 구조였다. 화장실은 오래된 인테리어를 고수해서 그런지 답답한 느낌이었다. 방 안을 가까스로 비집고 침대 바로 옆에 난 큰 창을 열자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들이 들어왔다. 호텔 바로 앞에 위치한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밀려왔고 바람에 실려 온 여름과 가을 중간 사이의 온도를 품은 바람은 호텔 정원에 자란 야자수 나무를 훑고 샤샤샥 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이 방이 여름 냄새로 가득 찼다. 레토 호텔의 레토(Leto)는 아마도, 여름이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