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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스패너 Apr 16. 2024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10년 전 오늘을 기억하시나요.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그 날을 기억할 겁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저희 학교는 아침이면 휴대폰을 모조리 걷어갔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았습니다. 점심 시간 직전 4교시였고, 우리는 학교 밖 소식과는 무관하게 오늘의 점심 메뉴 따위를 궁금해 하고 있었습니다. 



4교시는 국어 시간이었습니다. 평소 책과 칠판으로만 수업하시던 선생님께서 컴퓨터를 켰습니다. 그리고 기사를 띄워 보여주셨죠.



전원 무사 구조



아직도 TV 화면 속 사진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침몰하는 커다란 유람선과 그 주위로 몰려든 작은 배들... 작은 어선 뒤로 물보라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침몰했지만, 근처 어선들이 곧바로 다가와 모두 구조했다고 했습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기사를 읽어주셨습니다. 깜짝 놀랐다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때 저희도 수학여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미 학생들에게 어디로 가고 싶은지 사전 조사를 끝낸 뒤였고, 제주도로 정해져 있었죠. 1학년 부장이셨던 국어 선생님께선, 다행히 무사 전원 구조가 되었지만 어쨌든 국가적으로 큰 일이 발생했으니 우리가 수학여행을 못 갈 수도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밥을 먹고 여고생들의 필수 코스 운동장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때 저와 산책하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아니, 왜 하필 우리 수학여행 갈 때쯤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저도 호응했습니다. 우리는 최악의 오보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 대화를 내뱉던 순간이 정확하게 기억납니다. 급식실을 나와 3학년 건물을 등지고 정문쪽으로 향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왼쪽 옆에는 이후 편의점이 들어왔던 원룸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건물보다 조금 앞선 지점이었습니다. 나는 가디건을 입고 치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제 오른쪽에 서 있었고, 나는 친구의 갈색 머리 너머 쏟아져내리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습니다. 



나는 한참을 몰랐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오보였단 소식을 듣게 되었죠. 아까 그런 말을 내뱉은 걸 처음으로 후회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진 크게 와닿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그렇구나, 어쩌지... 그게 다였습니다.



내가 울기 시작한 것은 한 밤중이었습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스쿨버스에 올라탔죠. 마을 버스에 쓰이는, 그런 작은 버스였습니다. 나는 문 바로 뒤 1인용 자리에 앉았습니다. 머리 위에 달린 TV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뉴스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출발을 기다리며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희망은 있다며,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에도 10시간 정도 위쪽에는 공기가 있다며... 가라앉은 배와 그 안에 갇혔을 사람들이 계속 머릿속을 떠돌아다녀서 20분 후 동네에서 내릴 때까지도 나는 진정하지 못 했습니다. 




나흘째인 금요일 밤 무렵, 영문 모를 피로감이 찾아들었다. 이 피로감은 뼛속들이 느껴지지만 타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나를 비롯하여 그날 내가 만나고 말했던 대부분의 사람은 재앙으로부터 안전하게 거리를 둔 관중일 뿐이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았고, 참상을 텔레비전과 사진으로만 보았고, 구조 활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우리의 피로감은 뜬금없고 이상한 것이었다. 그날 내가 개와 산책할 때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고 하나같이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우리에게는 그런 절망감을 느낄 자격이 없다는 듯이. 그 주 초반의 지배적 감정이었던 두려움과 공포는 누그러졌고, 그 무렵에는 다들 막연히 울적한 의기소침에 빠졌다. 잔인하게도, 수많은 개개인의 비극적 사연들은 머릿속에서 흐려졌다. 언어마저 우리를 떠난 듯 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들 "멍하다"는 말만 했다. 그것이 공허한 단어인 걸 알면서도. 난 멍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멍해. 그날 저녁에 나는 집에서 이를 악물고 멍한 얼굴로 텔레비전을 보다가 캄캄한 잠에 빠져들었다. 


캐롤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재난에 의한 감정적 과부하」, 2020, P.277.





그리고 2학기, 우리는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원래는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가 비행기를 타고 나오는 일정이었지만 모두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기 탑승이 처음이었던 저는 친절한 승무원이 건네주는 음료수를 마시며 들떴습니다. 


학년 부장이셨던 국어 선생님께서 밀고 나가신 덕이었습니다. 국가적 비극이 있었고 자중해야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서 추억을 뺏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 어쨌거나 즐거웠습니다.


그렇다고 세월호를 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쏟아져나온 문학을 찾아 읽었고, 기사를 찾아봤고, 단식 투쟁을 하는 유가족들을 보며 마음을 조아렸고,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학교에서 나눠준 노란 리본을 항상 달고 다녔습니다. 즐거울 때마다 문득 피해자들이 생각났고, 죄책감이 들었다가, 슬퍼졌다가, 다시 즐거웠다가... 한동안 그런 시기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멍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 아닐까 싶다. 이런 오만 가지 감정들이 정신을 압도하는 바람에 우리가 피로와 무력함을, 그리고 감정들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반응은 인간적인 것이면서도 무서운 것인 듯하다. 사실 테러행위가 의도하는 효과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사기를 꺾어서 멍하게 만드는 것, 건물과 더불어 사람들의 의욕과 의지를 날려버리는 것. 그리고 이런 반응을 물리치기란 어렵다. 토요일 오후, 나는 여전히 멍하고 무기력하게 느끼면서도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 마흔아홉에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어떤 남자를 아는 친구들이 그를 돌보는 문제를 의논하려고 모인 자리였다. 갑자기 렌즈가 바뀌었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폭넓은 재앙의 파노라마가 물러나고 그 대신 훨씬 사적이고 개별적인 비극의 클로즈업이 초점에 잡혔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감정적 과부하가 우리를 마비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적 과부하는 일종의 무력한 좌절감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캐롤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재난에 의한 감정적 과부하」, 2020, P.280.





그리고 입 밖으로 세월호를 꺼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매년 4월이면 자연스럽게 16일을 떠올렸지만 캄캄한 잠에 빠져들듯 침묵했습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력감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잊은 듯 해보였습니다. 지겹고 피곤하니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진상규명은 지지부진 하고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슬프고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피곤하니 그냥 눈을 돌리는 것을 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복미사 집전이 있던 날이었지

한국일보 특집 칼럼을 쓰기 위해 나간 그날

광화문 제단 너머 경복궁 고궁박물관엔

바티칸에서 날아온 <천국의 문>이 전시되고 있었지

용산에서 망루에 오른 사람들이

화형을 당하고 있었을 때

세월호 침몰을 실시간으로 시청하고 있었을 때

삘딩과 삘딩 사이를 뱅글뱅글

그 어디에서 나는 밥벌이를 했지

그 어느 해인가는 명동까지 가서 세례를 받았지

불의 회오리와 배를 삼킨 소용돌이 속에서

고해성사 끝에 발을 뻗고 안식에 들던 날들

왜 이 고통의 느낌마저 가공된 것만 같은 것인지,

재주라곤 슬퍼하는 능력밖에 없건만

이 슬픔마저 왜 모조품 같은 것인지

그날 기념사진 액자를 벽에 걸었지

드라이버 끝에 십자형 나사

꾸욱 꾹 당겨진 근육이 골을 따라 회전할 때마다

쇳가루 눈물이 흘러나오던 나사렛

광화문 제단 너머 천국의 문까지


손택수,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2022, P.26.





이 시를 읽게 된 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23년 봄이었습니다. 전공 수업 과제로 시집 감상문을 제출 해야 했죠. 저는 표제작과 이 작품을 골라 감상문을 작성했습니다.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고, 시인은 썼다. 그렇다면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있는가? 

차례대로 살펴보며 시인이 바라본, 함께 할 수 있는 슬픔과 아닌 슬픔의 경계를 분석하고 나의 느낀 점을 서술하고자 한다.



「광화문 네거리에서」에는 '목격자는 함께 할 수 없는 슬픔이 당사자에게는 있다' 고 썼습니다. 



앞서 인용한 11~15연은 그 사실을 깨달은 후 화자가 느끼는 죄책감과 충격적인 심리를 담고 있다. 목격자인 화자는,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분명히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곧바로 생계를 위해 ‘밥벌이’를 했다. 일상을 살았다. 유가족이 끊임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사는 동안, 화자를 포함한 우리에겐 ‘고해성사 끝에 발을 뻗고 안식에 들던 날들’이 있었다. 우리는 분명 함께 했으나, 당사자성 앞에서 경계가 나누어진다. 목격자는 함께 할 수 없는 슬픔이 당사자에게는 있다. 


다들 부담없이 하는 과제였기에 따로 발표문을 써가지는 않았습니다. 미리 써온 감상문을 줄줄 읽는 식이었거든요. 앞에 나가 마이크를 쥐었습니다. 화면에 띄워둔 감상문을 읽다 말고, 이 글의 앞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그때를 떠올렸다. 오보를 목격했던, 구조 과정을 지켜보던 그때의 나. 그리고 수학여행. 칼럼을 쓰기 위해, 그러니까 생계를 위해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장소에 방문했을 때, 자신은 당사자가 아님을 선명하게 깨닫는 화자의 모습이 마치 이 시를 읽는 나 같았다고. 자신의 고통과 슬픔이 가공된 것 같고 모조품 같다고 얘기하는 화자의 심리에 깊은 공감이 됐다고. 그래서 나는 한동안 세월호를 입에 담지 않았다고. 



그 말을 하는 동안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조금 떨렸습니다. 목이 아팠고,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습니다. 이 시의 결말에 담긴 것처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사진을 건 시 속 화자처럼 우리도 '천국의 문' 너머로 향한 희생자들을 목격자로서 기억해야 한다는 말로 저는 발표를 마무리 했습니다. 

강의실이 고요해졌습니다. 



교수님께서 시를 두 편 더 읽어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은영 시인의 「그날 이후」, 손택수 시인의 「바다무덤」이라는 시였습니다. 교수님께 지목당한 한 학우가 진은영 시인의 시를 낭독했습니다. 낭독하던 학우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다가 잠시 중단되었고,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저도 눈물을 참으려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관객 학교」, 2022, P.47.





두 편의 시를 모두 읽고 난 뒤, 교수님께서 설명을 덧붙이셨지만 사실 잘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 제게 선명하게 남은 건 강의실 안 모두가 함께 두 편의 시를 읽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차곡차곡 이야기는 쌓였습니다. 나는 여전히 큰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세월호의 진상을 파헤칠 수 없고, 세상을 믿지도 못 하고 당장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기억하고 다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이 슬픔이 가공된 모조품 같을 지라도, 내 일상에 괴리감이 스며들 지라도 기억하고 직시해야 한다고. 외면하지 말자고.

그래서 오늘 이런 글을 씁니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멍한 감정과 수동적인 태도를 가르는 구분선이 아주 희미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헌혈을 할 수 있다. 구호 단체에 후원금을 보낼 수 있다. 편지를 쓰거나 청원서에 서명할 수 있다. 또한 나는 내 작은 세상 안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작은 세상들은 지금처럼 모두가 뒤엉킨 감정으로 멍한 시기에도 우리가 반드시 알아봐야 할 선물이다.


캐롤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재난에 의한 감정적 과부하」, 2020, P.281.





내 작은 세상 안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 기억하고 말하기.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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