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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Aug 03. 2024

덕질 공감





 내 딸은 카톡을 보내면 거의 바로 답을 하는 적이 없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도 연락이 잘 되지 않으면 걱정이 되는데 지금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답이 늦으면 걱정이 스멀스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거의 독립한 성인이래도 하나 밖에 없는 딸이어서 걱정이 되긴 되는 모양이다. 멀지도 않은 일본 도쿄에 있어서 사실 해외에 있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카톡에 대한 답이 늦거나 혹은 몇 시간 동안이고 읽은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신경이 쓰인다. 몇 일 전에도 거의 24시간동안 답이 없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었다. 회사에서 너무 힘들다고 투정을 하는 딸아이에게 '어느 회사나 다 그렇다'는 김빠진 답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잔뜩 삐졌는지 카톡을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딸아이가 원하는 답은 힘들어도 잘 참고 견뎌라, 수고해라, 힘들면 돌아와라 등과 같은 공감과 위로였을텐데 지극히 당연한 사실만을 무덤덤하게 말했으니 위로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답답함에 숨이 턱 막혔을 것이다. 


 지금까지 5년이나 해외에서 아무탈 없이 잘 견뎌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믿고 지켜보면 되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다 큰 성인에게 그러면 안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내는 거의 매일 생존 확인을 하려고 카톡을 보낸다. 어제도 보냈는데 딸아이는 2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답을 보내왔다. 아내의 걱정을 무색하게 하는 '사카키 네스'의 등신대(等身大) 옆에서 밝은 얼굴로 찍은 사진과 함께 말이다. 사카키 네스는 2024년도에 데뷰한 일본의 버츄얼 라이버이다. 버츄얼 라이버는 가상 유투버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술의 발달로 AI 기상케스터가 사람 대신 방송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 AI에게 대신 기상 케스터 업무를 맡기고 실제 인간 기상 케스터가 휴가를 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버츄얼 유투버 혹은 라이버는 가상이긴 한데 완전한 실사판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미소년 혹은 미소녀 같은 외모를 갖고 있다. 진짜 인간이 장막 뒤에서 몸에 센서를 달고 춤을 추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실제 인간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대중이 좋아할 만한 외모를 가진 가상 인물을 창조하여 실제로 유튜브로 방송을 하며 TV에 출연까지 하기도 한다. 심지어 구독자 수도 엄청나다.  


 진짜 사람에 질려서 이런 형태의 오락거리가 나온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인간이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고 상상 이상의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은 그 새로움을 창조해 낼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기술에 의한 새로운 오락거리의 탄생이다. 기술이 없었다면 이런 '기괴한' 버츄얼 유튜버는 세상에 나올 수 조차 없었을테니 말이다. 흔히 무언가에 깊게 빠져서 파고 들고 그것을 심도있게 즐기는 것을 '덕질'이라고 한다. 딸아이의 덕질은 중학생때 우리나라의 보이 그룹인 '인피니트'에서 시작되었다. 딸 아이는 인피니트의 리더인 성규에 대한 덕질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성적은 골로 보냈다. 물론 다른 이유가 더 크긴 하지만 덕질도 성적을 내리는데 약간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같은 앨범을 7~8 장이나 동시에 사서 뜯지도 않고 보관하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졸업 후에 일본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더니 결국 덕질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에서 찾게 되었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원룸에는 다양한 피규어와 사진들로 한 쪽 벽면이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꽤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취직까지 한 것을 보니 대학 생활 중의 덕질은 성적을 골로 보내지는 못한 것 같다. 


 덕질은 정도만 지키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인간 중에서 덕질을 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덕질이라는 단어의 '덕'은 '오타쿠 - 오덕후 - 덕후 - 덕' 이런 식으로 변하면서 이 세상에 나왔다. 결국 덕질은 오타쿠라는 말에서 왔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풍기지만 덕질은 오타쿠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오타쿠는 히키코모리의 특성을 가지면서 자기 파괴적이고 동시에 폐쇄적인 이미지를 갖지만 덕질은 매우 깊은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 기술 혹은 스포츠를 취미로 깊게 즐기는 것을 아마추어리즘이라고 하기 때문에 직접 행위로서 참여하지 않고 관중의 입장에서 즐기는 것을 아마추어리즘으로 포함하는 것은 무리가 있긴 하다. 다만 특정 분야에 덕질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 분야에 대한 프로 이상의 지식과 기술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마추어리즘은 덕질을 하는 사람도 넓은 의미에서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 중에서 덕질을 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단지 대상이 다를 뿐이다. 돈만 생기면 땅을 사는 땅부자는 땅에 대한 덕질을 하는 것이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틈만나면 책을 보는 사람도 책에 대한 덕질을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흙이 너무 좋아서 도시 외각에 작은 밭을 구해서 온갓 작물을 재배하며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농사 덕질을 하는 것이다.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덕질의 종류가 갈릴 뿐 인간의 모든 활동의 근간은 결국 덕질일지도 모른다. 나도 지금 아침부터 글을 쓰고 있으니 '글쓰기 덕질'을 하는 것이고 매일 매일 스토킹하듯이 딸아이 걱정을 하면서 안부를 묻는 아내는 '딸 덕질'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아해서 많이 하면 그게 덕질 아닌가? 인체에 유해하고 과도한 소비를 조장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면 모든 덕질은 존재에 타당한 이유를 부여받을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딸아이가 최근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버츄얼 라이버(유튜버)에 대한 덕질은 그래도 크게 유해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가상의 인간을 보고 환호하고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기뻐하는 버츄얼 라이버의 애호가들이 과연 어떤 즐거움을 느끼는지는 사실 짐작하기가 어렵다. 굳이 상상을 해 보면 재미있는 만화 영화를 보면서 마음에 드는 주인공과 감정이입을 하는 정도가 아닐까? 딸아이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왜 이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할 가능성이 크다. 이 말은 딸아이가 인피니트에 대한 덕질을 끝낸 후에 한 말과 정확히 동일하다. 당시 딸아이는 책상에 쌓인 무수한 사진과 앨범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앨범과 사진들은 하나 하나 분리되어 당근 마켓에서 새 주인을 맞거나 일부는 폐기되었다. 어쩌면 인피니트의 굿즈를 팔아서 사카키 네스의 인형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사카키 네스' 이 녀석도 같은 꼴이 날 것이 분명하다. 장담한다. 


 기술의 발전 때문인지 온 세대가 가상의 세계로 향하는 것 같다. 그 뒤켠에 현실이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다. 줌회의를 할 때에도 AI로 사람을 창조하여 실제 인간 대신 회의에 참석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의 발전은 이미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기 시작한지 오래 되었다. 다음엔 또 뭐가 튀어 나와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궁금하다. 이미 우리는 다양한 수단을 통하여 가상 현실 속에 발을 딛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깊게 빠져들지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이런 우리의 미래는 어쩌면 가상 현실 기술에 빠져서 끊임 없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려는 AR 덕후들의 손에 달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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