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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하고 말랑하게 Sep 12. 2024

추억저장소 : 즐거운 우리집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봄까지 살았던 마을은 흔히 말하는 완전 촌 동네였다.


 우리 집은 마을 입구 초입에 있었는데 다른 집들보다 아파트 한층 정도 위쪽에 자리해 담벼락이 매우 높았다. 거기다 커다란 솟을대문에 기와로 된 처마가 있어 속 모르는 사람이 밖에서 보면 아주 부잣집에 위세가 등등한 집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으나, 막상 집 안으로 들어가면 흙으로 지은 한옥에 기와지붕도 아닌 초가로 엮은 초라한 지붕을 얹은 볼품없는 집이었다.

 

 게다가 부엌은 흙바닥에 아궁이가 있는 아주 옛날식 부엌이었다. 그곳을 우리들은 ‘정게’라고 불렀는데 평소엔 연탄불을 떼다가도 가끔 엄마가 가마솥 쓸 일이 있을 때는 아궁이에 나뭇가지들을 넣고 불을 때기도 했었다. 나는 아궁이에서 나뭇가지가 타는 냄새와 타닥타닥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아궁이에서 불을 땔라치면 재밌는 놀이 하듯이 아궁이 속을 휘휘 저어서 엄마한테 혼나기 일쑤였다. 


 화장실도 당연히 푸세식이었다. 누가 화장실과 안방은 멀수록 좋다 했던가. 대문 바로 옆에 붙어 있던 화장실을 밤에 혼자 가기 위해 나설 때마다 무서워 주문을 외다시피 하며 후다닥 다녀오곤 했다. 


 초가지붕 집에 아궁이 불때는 정게, 거기다 푸세식 화장실. 누가 들으면 6,70년대 얘기 아니냐며 놀랄 수도 있지만 올림픽도 끝난 90년대 초 우리 집 풍경이 정말 이러했다. 90년도에 그런 초가지붕에서 살았다는 게 상상이 되는가. 그만큼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래도 그곳은 마당과 텃밭이 넓어 어린 우리 형제들이 뛰어놀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어린아이에게 시골집은 놀거리 천지다. 그래서 나는 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도 않고 놀았다. 툇마루 판자를 떼어내고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장독대 난간에서 슈퍼맨, 배트맨을 외치며 뛰어내리기도 하다가 동네 아이들과 마당 뒤편에서 춤도 췄었다. 


 그렇게 놀다 발견하게 된 재밌는 놀이 중 하나가 동생과 내가 큰 고무대야에 타면 작은언니가 썰매 끌 듯이 끌어 주는 거였는데 나중에는 굴렁쇠 굴리듯이 굴려주기도 했었다. 고무대야는 한 명씩만 탈 수 있었는데 안에 탄 사람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언니가 반듯하게 굴려주는 식이었다. 혹시나 균형을 잘 못 맞추면 대야가 한 번만 굴러가고 멈추기도 했으니 타는 사람과 굴리는 사람의 호흡이 굉장히 중요했다. “대야에서 발이 빠져 나오면 안 되지. 한 번밖에 안 굴러가잖아! 나 하는 거 보고 따라 해봐!" 나는 동작이 서투른 두 살 어린 동생에게 의기양양하게 잔소리 해 대곤 했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 보면 배가 엄청 고팠는데 우리 집엔 밥 말고는 먹을 게 거의 없어서 저녁밥을 항상 맛있게 먹었다. 반찬이라곤 김치, 깍두기, 된장국 정도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먹었던 밥도 쌀이 부족해 쌀보다 보리가 더 많이 들어있는 잡곡밥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매일 건강식을 먹은 거지만, 하루종일 신나게 놀다 들어온 어린아이에게는 항상 허기진 한 끼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먹을 게 없다 보니 맨밥도 항상 맛있게 먹던 우리들은 가끔 집에 오시던 짓궂은 동네 어른들에게 “아이고~ 흥부네 제비 새끼들! 뭣에다 그렇게 맛나게 먹냐?” 하며 놀림 받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정말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었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릴 때의 난 우리집이 그렇게 가난한지도 몰랐었고, 매일 집안 구석구석 놀잇감을 찾아내어 노느라고 마냥 즐겁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 동네가 개발되어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으니 내가 그곳에서 지낸 건 내 생애 10년 남짓의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여기저기 이사를 다녔지만 아무 걱정도 없이 뛰어놀던 그 시절이 늘 그립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해지는 요즘에 30년도 더 지난, 내 인생의 4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시간을 함께 한 그곳에서의 일들이 이토록 생생한 까닭은 그만큼 그곳에서 맛본 행복감이 강렬했기 때문이리라. 


 추억에 후각이 버무려졌을 때의 기억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직도 매캐한 타는 냄새가 어디선가 피어오르면 내게는 너무나 반가운 고향의 향기인지라 가슴이 순간 뭉클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늘 주택에 살고팠다. 비록 지금은 답답하고 꽉 막힌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결국엔 주택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그때처럼 가난이 무엇인지 걱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신나는 인생을 함께할 나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그곳은 늦은 밤 엄마를 기다리는 형제들이 쪼르르 누워 툇마루에서 보았던 밤하늘의 쏟아질 듯 무수한 별들이 보이는 천창이 있는 곳일까?


 능소화 넝쿨이 늘어져 수수한 멋이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마당에 툇마루가 있는 집이 놓여있는 풍경을 상상하며 오늘도 난 흐뭇한 웃음을 머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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