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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타쿠나 Apr 22. 2024

[함께읽자] 가난을 이해하는 방식

안온 <일인칭 가난>, 노인경 <자린고비>

가난은 모래시계의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처음 모래가 야금야금 떨어질 때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가끔씩 타던 비행기를 더는 탈 수 없게 된, 불편하지만 무시할 수준이었다. 잘 실감나지 않던 변화는 종국에 가까워지자 걷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하필 그 와르르의 순간은 취업 준비를 시작할 때 찾아왔다. 실전에 임해보니 무난할 줄 알았던 취업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그랬기에 손에 쥔 등록금 고지서 금액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전에는 모든 일이 곧 잘 풀린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대출 잔액 앞에서도 용감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주춤하다 반등할 줄 알았던 가계곡선은 끝 모르게 추락하고 있다. 이미 쌓인 빚을 갚을 길도 막막하다. 그런 나를 살린 건 뜻밖의 가계곤란 장학금이었다. 


아무리 공부해도 찔끔 주던 장학금은 ‘우리집 가난해요’라는 명패를 다니 초고속으로 등록금 전액이 쥐어졌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겨우 숨을 뱉은 순간 안도감은 수치심으로 바뀌었다. 우리 과 장학금 결재 담당자는 평소 수업을 즐겨듣는 교수님었는데 하필 그 학기에 몇 번 지각을 한 터였다. 내가 부모님 집 월세보다 비싼 자취방에서 산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이다. 형편에 안 맞는 집에 살면서 지각도 하는 정신 못 차린 학생으로 보일까봐 수치스러웠다. 그 수업 시간만 되면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남은 기간 동안 투명인간처럼 있기를 택했다. 궁금한 내용이 있어도 질문하지 않았다. 헛소리 질문을 해 다른 학생들이 지불한 수업료를 깎아먹고 싶지 않았다,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다. 눈치 보는 내 모습을 자각할 때마다 변한 처지를 실감했다.


<자린고비> : 김밥 한 줄 얻어먹을 수 없는 마음


아이의 그림책을 보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소와 다른 기준으로 행동 하나하나를 검열했던 모습을 책 속에서도 발견한다. 그런 강박이 가난을 마주할 때 거치는 자연스러운 단계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노인경의 그림책 ‘자린고비’의 주인공은 자린고비는 어려서부터 가난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재능으로 밥벌이를 해낸다. 그에게는 10년째 일을 주는 편집자가 있다. 업무 매너도 깔끔하고 고마운 사람이다. 한날은 업무 미팅 중 자린고비 배에서 나는 꼬르르 소리가 유난히 크다. 편집자는 함께 점심을 먹자고 제안한다. 자린고비가 고른 메뉴는 고작 김밥, 편집자가 업무진행비로 사려는 것마저 거절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제 빚을 갚을지 알수 없기 때문에 어떤 호의도 받을 수 없다. 마음과 의도 보다는 가격표를 기준으로 행동을 바라보게 된다. 가난이란 10년을 같이 일한 사람에게 김밥도 얻어먹을 수 없게 하는 마음이다.


내게도 한없는 호의를 베푸는 친구가 있었다. 가세는 기울었고 시험에는 계속 떨어져 속이 문드러질 때 친구는 다디단 빵을 사들고 왔다. 감격했지만 되돌려 줄 길이 보이지 않아 더 슬퍼졌다. 그 친구는 나의 자취방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서로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그런 친구였음에도 새로 이사한 자취방으로는 들일 수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업을 하지 못하자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리는 심정으로 구한 방이었다. 오랫동안 살던 학교앞 자취방은 분수를 넘어서는 호사가 됐다. 초라한 처지이니 열악한 방으로 가야 마땅하다고 여겼지만, 그 방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을 만큼 기괴했다. 


잡주인은 쪽방처럼 칸막이를 만들어 여러 개의 방을 창조해냈다. 새벽녘 옆방 세입자의 소변줄기 소리를 듣고 깬 적이 있을 만큼 사생활 보장을 무시한 구획이었다. 건넛방 중년 여성은 문을 열고 시래기 된장을 곧잘 지졌다. 가난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내 방에 배인 묵은 된장내와 그 냄새가 내포한 사정은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철저히 혼자가 되는 편을 택했다. 누구도 초대하지 않고 만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포기하는 게 많아질수록 반대급부인듯 돈 되는 것은 악착같이 거머쥐었다. 페이가 좋다는 이유로 장거리를 오가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말밖에 볼 시간이 없던 당시 남자친구의 불만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기쁨과 낭만, 불편과 모욕쯤은 참아낼 수 있었다. 그 서늘한 각오는 어렴풋해질지언정 지워지지 않는다.

 

가난은 '차마 잃을 수 없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안온의 <일인칭 가난>에서 드러난 태도가 처음에는 잘 믿기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20년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가난의 상태를 가장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정보다. 하지만, 가난에 이른 과정과 그것이 지속되는 양상을 얘기하려면 어떤 표현을 써도 충분치 않다. 아무리 명료해지려 해도 실체를 드러낼 수 없을 때 우리는 문학을 쓰고 읽는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글은 시적이다. 적나라해질 수 없었기에 마음을 더 서걱거리게 한다. 그의 아빠는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은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이고 가정폭력자였다. 엄마도 사고로 무릎을 다쳐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친할머니는 4살짜리 저자 앞에서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등지고, 아빠마저도 딸의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저자는 성인이 된 뒤 살려고 집을 나왔는데 살아가려니 죽을 만큼 일해야 했다.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손님이 남긴 고기가 식사가 되고 13시간씩 주말알바를 할 때는 햄버거를 씹지 않고 삼켰다. 


그는 공부를 잘했다. 번듯한 대학에 합격했고 과외교사와 학원강사로 밥벌이를 했다. 어느 날은 과외를 할 때 뿌렸던 번호로 전화가 왔다. 삼성 자기소개서를 대필해주면 500만원, 합격하면 200만원을 성공보수로 준다고 했다.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게 솔직히 잘 믿기지 않았다. 일상이 그토록 고단한데, 생리가 끊길 만큼 몸을 혹사하는데, 그 제안을 받아들여도 사람들이 쉽게 비난할 없을 텐데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저자는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자존심 때문이라고 했다. 자존심은 현실이라는 힘센 단어 앞에서 흔적기관처럼 돼 버린 이름이 아니던가. 하지만 저자에게는 차마 잃을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 소중해서 '들고 다니면 오염되고 찢어질까봐 기숙사 이불 아래에 소중히' 두고 나오는 보물이었다.


그 마음을 보고 느낀 것은 어떤 종류의 당혹스러움이었다. 굳건했던 기준이 깨지는 데서 오는 혼돈이었다. 돈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게 가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난을 이해한줄 알았는데 가난을 하나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용광로가 아니었다. 오히려 두터운 모래를 거둬내고 화석을 드러내는 발굴작업에 가깝다. 좀처럼 알 길이 없던 차마 잃을 수 없는 것의 정체가 수면위로 드러나는 과정이다. 가진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을 하나씩 잃어가는 지난한 소거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일인칭 가난>의 저자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건 바로 품위였다.


책 판형이 작고 두께도 얇지만 독서의 여운이 꽤 깊었다. 마티는 좋아하는 출판사 중 한 곳이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남은 것은…끝내 알지 못했다. 그것을 확인하기 전에,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것을 잃는 상태가 되기 전에 상황이 극적으로 좋아졌다. 기적적으로 좋은 회사에 취직했고 가세도 살아나 부모님은 신축 아파트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겉으로 보면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랬기에, 가까운 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밀한 과거로 남았다. 창피하거나 숨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어떻게 설명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겪은 곤경을 가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난이 맞다하더라도 머무른 시간이 그 주제를 논할 만큼 충분한게 맞을까. 분명 개인으로서는 치명적이었지만 공적인 의미로는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그 격차를 무시하고 ‘가난은 이런 것이지’ 선포하듯 말하면 극복의 서사를 자랑하려고 가난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가난을 말할 때 사람들은 유독 주저하게 된다. 가난이 일반적으로 장려되지 않는 상태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빈곤이 ‘제일’ 빈곤한 상태를 반영하지 못할까봐 망설인다. 더 큰 가난을 겪는 이에게 누를 끼칠까봐 염려한다. 심지어 이 책의 저자조차 조심스러워한다. 수급 밖의 더 열악한 가난을 제대로 모르기에 가난을 주어로 문장을 쓰는 것을 망설였다. 행복과 성공을 논할 때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언정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과 너무 비교된다. 가난은 왜 이렇게 힘들까, 우리를 움츠러 들게 할까. 

 

가난의 처절한 측면만 비추면 말할 수 없는 영역이 늘어나게 된다. 더 센 수위, 더 자극적인 경험을 전시하고 나열해야 할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 이해한 가난은 한 단면 만을 드러낼 뿐이다. 가난해도 잃을 수 없는 것, 무너지지 않을 힘을 준 것들이 빠지면 어디에서 인간다운 면목을 찾을 수 있을까.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아빠가 자살한 뒤 엄마와 필리핀 세부로 패키지 여행을 간 것이었다. 3박 5일의 여행이 끝나고 모녀는 '단 하나 쥐어진 추억 사탕을 할짝할짝' 핥는다. ‘칠리크랩은 역시 세부지, 맥주는 역시 세부지, 스파는 역시 세부지'하며 같이 고개를 주억거릴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저며온다. 그런 심정을 놓친다면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을 잃는 것과 다름 없다. 어려움을 통해야 드러나는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일인칭 가난> 같은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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