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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쟁이 Oct 29. 2024

그저 내려놓아 봅니다

생각들을 그저 머릿속 백지 위에 떨어뜨리는 연습을 해 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교사'라는 정체성을 빼고 생각해 보려고 한 적이 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공부하느라 잠시 필드에 떠나 있었던 시간이 있긴 했지만, '교사'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기에 그건 힘든 것이었더라고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도 즐겁고 가르치는 것이 좋았지만,

그 외의 것은 저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큐비클 안에서 하루 종일 책 보고 연구하고 음악 들으면서 혼자 지내도 좋을 것 같은데,

'교사'는 하루 종일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사회화된 내향형 인간이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즐겁고. 상냥하고. 친절한 선생님이자 동료' 스위치를 켜요. 몸이 피곤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날이라도, 일부러 더 밝고 상냥하게 인사해요.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사회화된 외향인 버전 스위치를 끄고 연구실이나 교실에 홀로 콕 박혀서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요.   

수업 끝나기 전까지 스위치를 내내 켜고 있느라 소진된 에너지를 혼자만의 시간으로 보충해야 하거든요.


제 하루의 루틴이라면 루틴이었는데, 요즘에 계속 괴로웠던 이유가 '홀로움'을 잠시라도 보낼 수 있는 시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구나 깨달았습니다.


요 며칠 아니 솔직히 요 몇 주 동안, 저는 참 괴로웠어요.

복직을 하고 원치 않는 과목의 전담에. 갑자기 병가를 내고 들어간 동료의 업무를 맡게 되었거든요.

거기까지는 학교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지만, 제 공간이 없다는 건 정말 '극내향인' 저에게는 힘든 일이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혼자 가만히 저만의 공간에서 오늘 하루 수업을 차분히 돌아보고, 밀린 업무도 처리하고

멍 때리기도 하면서 에너지를 다시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럴 시공간이 없었어요.  

수업 정리도, 수업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쫓겨나듯 연구실로 짐을 옮겨와야 했거든요.


연구실은 제 공간이 아니라, 학년이 같이 쓰는 공간이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불편했고요.

제 교실에서 제 컴퓨터로 일을 하다가, 공간을 옮겨서 공용 컴퓨터로 다시 흐트러진 집중력을 다시 되돌려서 일을 하려면 효율성도 떨어졌어요. 무엇보다도 연구실에 다른 선생님들이 오고 가실 때마다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거든요. 혼자 '홀로움'을 즐기는 저로써는 적응하기 힘든 기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 몇 주는 바뀐 시공간에서 적응하느라 애를 좀 먹었습니다.


비단 내향인, 외향인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할 때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

정리되지 않은 공간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

뭔가 쫓기는 기분이 든 채로 도망 나오듯 교실을 비워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무척이나 스트레스였거든요.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궁리해 봤어요.


불투명한 책상 가리개 (?!)를 하나 설치하고 나니, 없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제가 교실을 '빌려주는' 입장인데, 제가 꼭 교실을 '빌려 쓰는' 입장인 것 처럼 계속해서 이것저것 무리하게 요구를 하는 바람에 제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양해'를 구하는 것과, 당연한 듯 '요구'를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인데

다수의 편의를 위해서 한 명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속상했습니다.

서로 좋게 좋게 서로를 위해주는 말로 풀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서로를 위하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예전 같았다면 불편한 감정이 물 밀듯 몰려와도, 그저 억눌렀을 텐데 책을 쓰고 나서 저는 확실히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저를 지키기 위해서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기 시작했으니까요. 표현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요. 그러는 바람에 작은 소동이 일렁이긴 했지만, 그래서 며칠 동안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말하지 않았다면 제 마음이 더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그 덕분에 연구실 한편에 가림막도 생겼네요. 오늘 그 가림막 덕분에  사회화된 외향인 버전 스위치를 끄고 '홀로움'의 시공간을 잠시 잠깐이라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요즘엔 연구실에서도 조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어요.  


극내향인 저에게는 어쩔 수 없이.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공간이 꼭 필요한 것임을.

그래서 그동안 마음이 힘들었었구나 깨닫게 된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교사'라는 정체성을 한 켠에 묻어놓고 글을 쓰려니

제 일부분을 감춘 채 글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털어놓으니 마음도 글도 한결 편해졌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제 삶의 곳곳에 묻어있었을 텐데..

먼지 털어내듯 툭툭 털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채워 넣으려 하지 말고, 감추거나 덜어내려고도 하지 말고.

그저 내려놓으려 해 봐야겠습니다.


생각들을 머릿속 백지 위에 떨어뜨리는 연습을 해보라고 한 웨인다이어의 말을 기억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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