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부모님과 무궁화 열차를 타고 목포에 가다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가 있다. 노랫말에 영산포 안개 속과 유달산이 나온다. 언젠가 부모님이 구수한 음색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한 구절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부모님은 고향이 전라북도라서 그런지 남도의 정취가 물씬 나는 노래들을 곧잘 부르신다. 옛 노래들은 흥겨운 가락에도 왠지 모르는 서글픔이 서린 곡들이 많다. 고달픈 민초의 삶을 노래로 위로하면서 애틋함이 배어 있다. 전라도 지역 노래들에서 그러한 정서가 더욱 느껴지기도 하는데, 부모님의 기억 속에 목포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목포를 하얀 눈 속의 도시로 기억할 것이다. 눈 위에 찍힌 부모님과 함께 남긴 발자국은 사라진 눈처럼 발화되었지만, 내 기억에는 오래 남아 있으리라. 유달산에 오르는 해상케이블카 아래로 펼쳐진 바다와, 도시를 금빛으로 물들인 노을을 보며 붉게 물들었던 마음, 하얀 산자락에 서 있던 사슴의 눈망울, 차갑고도 따뜻한 공기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는 밤이면 늘 잠을 뒤척였는데 목포에서 첫날밤에 달고 깊게 잤다. 혈육의 숨소리와 말소리를 지척에서 느낄 수 있던 안온함 때문이었는지, 낯선 타지에서의 하루를 마친 피곤함 때문이었는지 오랜만에 선물처럼 달콤한 잠에 녹아들었다.
장소를 이동할 때 주로 버스를 타서 종종 환승해야 했다. 그때마다 최대한 적게 걷는 동선을 택했다. 90세인 아버지가 10분 이상 걷기에는 무리인 까닭이다. 반면에 성격이 밝고 활동적인 엄마는 걸음도 행동도 빠르셔서 젊은 두 딸 보다 앞장서서 걸으실 때가 많았다. 엄마는 연세에 비해 몸과 마음도 젊지만, 최근에는 부쩍 피로를 많이 느끼시고 힘에 부치신다. 낮에 만나서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어도 젊은 딸들보다 기력이 짱짱하던 분이신데 이제는 서둘러 귀가하고 싶어 하신다. 어머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작고 나지막하게 바뀌었다. 그런 모습을 대할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고 가슴 한쪽이 가라앉는다.
목적지로 이동할 때 택시를 타자고 했지만, 두 분 모두 굳이 마다하셨다. 급한 일도 없는데 천천히 구경하자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얀 눈이 덮인 산과 들을 바라보며 굽이굽이 펼쳐진 아름다움을 마주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버지를 부축할 겸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다.
아버지의 손은 참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큰 손바닥은 포근한 아기 손 같았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강하게 키우느라 매우 엄한 편이었던 터라 나는 아버지의 손을 거의 잡아 본 기억이 없다. 내게 의지해서 걷는 아버지의 손이 오래오래 생각날 듯싶다.
3박 4일의 동안 오전 9시경 나가서 오후 5시쯤에 호텔로 돌아오곤 했다. 꼭 보고 싶은 곳을 위주로 둘러보고 부모님의 체력에 맞춰 저녁 식사도 일찍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쉬운 마음에 호텔에 있는 사우나를 들르곤 했다. 나는 평소 대중목욕탕에 가지 않았지만, 이번에 뜨끈한 물맛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 부모님과 여행하는 곳곳에서 사우나를 찾곤 한다.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해서 익히지 않은 날 음식을 피하고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 우려하던 일이 생겼다. 여행 이틀째, 아버지는 배탈이 나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셨다. 우리는 걱정과 당혹감으로 잠을 설쳤다. 아침이 되기 무섭게 우리는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동생이 전망 좋은 호텔보다는 목포 시내와 가까운 곳으로 선택했는데 동생의 선견지명이 빛났다.
아버지가 아프시니까 남은 일정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어서 동생과 나는 차편을 알아보는 등 분주했다. 아무래도 지병이 있으신 연로한 아버지와 무리한 여행을 강행한 것이 아닌지 후회로 가슴이 먹먹했다. 그 순간 엄마가 하신 말씀에 웃음을 나왔다.
“얘들아, 아버지가 탈이 좀 난 것 같은데, 아파도 여기 있으련다. 언제 너희들하고 목포를 또 오겠니, 모처럼 온 건데, 치료 잘 받으면 괜찮을 것 같아.”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엄마의 저력이 여지없이 발휘된 순간이다. 아버지의 증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하면서 전전긍긍하던 우리는 그 말 한마디에 순간 먹구름이 걷히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꼼꼼한 아버지에 비해서 매사에 경위 밝고 긍정적인 성품인 엄마는 평소에 우리들이 기운 빠져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엔도르핀을 팍팍 부어주는 말씀을 잘하신다.
힘없이 누워 있는 아버지도 무언의 눈빛으로 승낙하신다. 그러고는 미안한 눈빛을 담으셨다. 본인 때문에 즐거운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는 마음에 애써 힘을 내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곁에서 지켜보기에 짠했다. 어쩌면 아파도 여행을 마치겠다는 두 분의 의견에 다시 순응하는 두 딸.
“그래, 맞아, 여기에서 치료를 잘 받아 보지, 뭐, 그래도 안 좋으면 택시를 대절해서라도 가면 되고, 아니면, 남동생이든 남편들이든 오라고 하자!”
엄마는 말씀은 그렇게 했어도 밤새 아버지 보느라 지치셨다. 엄마도 아버지와 병실에 나란히 누워 영양제 한 대 맞았다. 우리 자매는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오후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다행히 아버지의 배탈 증세가 가라앉은 덕분에 병동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너희들이 나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았구나, 미안하고 고맙다.”
“아버지, 감사해요, 빨리 나으셔요.”
다음날, 온전히 남은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하룻밤을 더 지냈다. 이제 우리는 동고동락을 한 전우가 되어 예약했던 무궁화 열차를 타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