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NIQUE한변 May 09. 2024

남이 할 말을 대신 해주는 변호사,  일의 시작은...

자신도 알지 못했던 의뢰인의 진심이 드러나는 과정

변호사 일의 시작은 이렇다.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의뢰인의 하소연을 듣는다.
의뢰인은 어려웠던 모든 인생을 털어놓는다.
이미지 출처 : Adobe Firefly로 생성

의뢰인들은 거의 20년 전의 일도 어제 일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상담의 시곗바늘은 어느덧 20년 전으로 돌아가있다. 변호사가 된 초기에 내 나이 30세 때에는 ‘아니 어떻게 20년 전의 일이 기억이 나나’ 싶었다.

나의 기준으로 20년 전이면 10살이라 사실 기억이 나는 장면이 몇 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이해가 간다. 나도 20년 전의 일이 그리 오래되게 느껴지지 않는 나이에 들어섰고 정말 과장을 보태면 그저께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이가 많이 지긋하신 어르신과 상담할 때는 병자호란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 그분의 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였던가… 병자호란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한참 하셨다.

그동안 얼마나 다른 사람들이 이 어르신의 이야기를 안 들어줬으면 본 적도 없으신 선조가 한 일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싶으실까 싶어 잠시 들어 드렸던 적도 있다.


남의 말을 대신해 주는 일을 하는 변호사는 의뢰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말은 변호사 머릿속의 논리 구조나 순서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상대의 말을 그대로 듣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서면에 쓸 말을 위주로 유도하고 싶은 경우가 많고 실제로 많은 변호사들은 상담할 때 의뢰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답변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11년 차 변호사로 수많은 의뢰인을 만나고 보니 기본적으로 의뢰인이 말을 편하게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가치해 보이는 많은 자료 중에 사건의 핵심이 되는 보석이 숨어있는 것처럼 연관 없어 보이는 많은 말 중에 사건의 중요한 단서나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해결되었으면 하는 의뢰인의 진의가 담겨 있기도 하다.


특히 가사사건(이혼, 상속)이 그렇다. 가사 분야는 가정생활의 내밀한 부분을 다루는 분야다 보니 여러 일상적인 사실관계 안에서 유의미한 사건들을 추려내어 구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중요한 일을 중심으로 듣다 보면 일련의 부부의 삶이 아닌 단편적인 면모만이 드러나게 된다. 또한 중요 내용만을 추려서 듣게 되면 의뢰인의 진정한 의사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의뢰인 스스로가 혼란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이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아이들 때문에 참아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송을 하는 이유가 상대방의 잘못을 확인하여 위자료를 최대한 많이 받고 싶은 건지 소송까지도 할 수 있다고 보여주면서 상대에게 겁을 주고 태도의 교정을 가져오고 싶은 건지도 혼란스럽다.


변호사가 의뢰인과 많은 대화를 하다 보면 위와 같은 불명확한 것들이 정리가 된다.

이혼을 하고 싶다고 온 의뢰인이 있었다. 상대방의 귀책사유도 있고 충분히 증명도 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상대방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어서 조정으로 금방 사건이 종결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의뢰인의 말을 충분히 듣다 보니 스스로 이혼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어서 당장 이혼을 하겠다고 왔지만 그분의 진심은 일단 겁을 주고 상대가 돌아와 용서를 구하면 받아주고 살고 싶었던 것으로 읽혔다. 상대방이 정말 반성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는지 확인하고 후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진짜 이혼을 진행하는 것으로 절차를 정리하고 이혼 조정을 신청하였다. 상대방은 진짜 이혼이 될 것 같자 진심으로 후회를 하고 가정으로 돌아왔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진정한 의사가 변호사와 더 많이 대화하면서 드러날 수 있었다. 남의 말을 대신해 주기 위해서는 그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백현우와 홍해인, 이 드라마는 판타지가 아니다 리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