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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독립전쟁과 스페인 통로

중프랑크 - 부르고뉴 - 스페인 제국으로 거듭 나타난 중앙유럽의 회랑

by 이원규

카를 5세(1500–1558)는 부르고뉴계 합스부르크의 상속을 통해 저지대(Nederlanden)를 획득하였고, 오랜 통치 과정에서 서로 다른 봉역을 하나의 행정적 단위로 통합하였다. 카를은 신성 로마 황제이자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저지대 귀족과 장기간 교류하며, 현지 관습법과 특권(privileges)을 존중하는 현실적 통치 전략을 취했다. 반면 그의 아들 펠리페 2세(1527–1598)는 스페인을 중심 거점으로 선택하고, 저지대를 스페인 제국의 변방이자 재정·군사적 자원 공급지로 간주하는 중앙집권적 통치 모델로 전환하였다.

이 차이는 종교개혁을 다루는 방식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저지대는 상업 도시와 인쇄 문화의 활성화로 초기에 개신교(특히 칼뱅주의)가 급속히 확산되었으나, 카를은 종교 탄압을 추진하더라도 현지 엘리트와 협상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반면 펠리페 2세는 카스티야식 절대주의 원리와 종교적 일체성을 관철하려 했고, 개신교 세력뿐 아니라 세금과 행정 개혁에 반대하는 전통적 가톨릭 귀족들까지 잠재적 반역 세력으로 취급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의 도화선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저지대와 스페인을 하나의 제국으로 유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저지대-프랑슈콩테-사보이-밀라노-지중해-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스페인 통로”(Spanish Road)였다. 이 통로에 저지대와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서막

William_I,_Prince_of_Orange_by_Adriaen_Thomasz._Key_Rijksmuseum_Amsterdam_SK-A-3148.jpg 그림 1 오라녜 공(침묵공) 빌럼의 초상화. 아드리안 토마스 케이(Adriaen Thomasz Key) 작, 1579년경.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결정적 순간은 오라녜 공(침묵공) 빌럼(1533–1584)의 귀국과 봉기였다. 그는 홀란트·제일란트·프리슬란트의 스타트하우더(stadhouder)로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종교 관용 정책을 지지했는데, 이 점 때문에 알바 공의 강경 진압 정책의 표적이 되어 독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여 반란을 이끌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이끌면서, 그도 개신교로 개종했다.

초기에는 저지대 유력자들이 공개적인 반역을 꺼렸고, 반란군 역시 스페인 통로(Spanish Road)를 통해 수송된 스페인 정규군(테르시오, tercio)에 밀려 고전했다. 이 통로는 북이탈리아에서 저지대까지 이어지는 지상 보급로로, 지중해 해상 봉쇄 없이 알프스를 경유해 병력과 자원을 안정적으로 이동시키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1576년, 스페인 국고의 지속적 파산과 용병 임금 지불 지연으로 인해 통제력을 상실한 테르시오가 안트베르펀을 약탈하고 수천 명의 시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스페인의 분노(Spanish Fury)’ 사건은 저지대 전역에 충격을 주었고, 반스페인 정서가 폭발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Tachtigjarigeoorlog-1576-1577 (1).png 그림 2 겐트 화의(1576)의 결과로 1577년 초 결성된 브뤼셀 연합(Unie van Brussel)에 참가한 16주(초록색)와 스페인에 충성한 룩셈부르크(노란색).

그 여파로 1576년 11월 8일, 17개 주 대표가 겐트에 모여 ‘겐트 화의’를 체결했다. 이들은 종교적 차이를 뒤로하고 스페인 군 철수와 지방 자치의 회복을 요구하며, 공동으로 스페인에 맞서 싸울 것을 선언했다. 이는 저지대 전체가 일시적으로 반스페인 전선 아래 결집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남부를 제국에 묶어둔 종교와 스페인 통로

그러나 스페인 통로의 북단인 룩셈부르크는 가톨릭이 강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귀족층의 충성도 높았으며, 지리적으로 반란 중심지와 거리가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동요가 적었다. 이 때문에 화의에는 형식적으로 참석했을 뿐, 스페인에 충성을 유지했다.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와 독일, 저지대 사이를 잇는 전략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은 요충지였기 때문에, 17주 중 스페인에 충성한 단 1주가 이곳이라는 점은 저지대 반란군에게는 심각한 군사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Nederlanden_1579.png 그림 3 1579년의 아라스 연합(파란색)과 위트레흐트 연합(주황색 계통), 스페인 충성주(노란색).

종교 갈등과 스페인 통로를 통한 스페인의 영향력 투사는 저지대를 분열하게 했다. 플랑드르의 겐트에서 칼뱅파가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회를 탄압하며 급진화하면서 남부 가톨릭 주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어진 1578년 1월 31일 장블루 전투에서 반란군이 패배하면서 이러한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스페인 역시 남부 가톨릭 주들을 상대로 이전보다 관용적인 통치를 약속하며 회유에 나섰다. 이에 따라 1579년 1월 6일, 가톨릭 중심지인 아르투아와 에노, 두 지역이 ‘아라스 동맹’을 결성해 스페인 측에 가담하며 연합전선에서 이탈했다.

이에 맞서 1월 23일, 헬러, 홀란트, 제일란트, 오멀란던(흐로닝언 일대) 등 북부 4개 주가 ‘위트레흐트 동맹’을 맺고 반스페인 전선을 재정비했다. 위트레흐트 동맹은 곧 북부 개신교 주들의 결집체로 확대되어 독립전쟁의 주축이 되었다. 반면 스페인은 룩셈부르크와 아라스 동맹 등 가톨릭 우세 남부 지역을 확보했다.

독립전쟁 이전에는 저지대 전역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뒤섞여 있었으나, 장기화된 전쟁 속에서 개신교도는 북쪽으로, 가톨릭교도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이로써 저지대는 종교와 정치에 따라 북부와 남부로 분화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분리로 이어지는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

CaminoEspañol_middlefrancia.png 그림 4 스페인 통로(화살표)와 스페인 제국(주황색), 신성 로마 제국(자주색), 옛 중프랑크 왕국(옥색).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 전쟁 동안 장기간 공세를 지속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스페인 통로의 존재였다. 스페인은 다음 지역의 동맹 또는 종속 관계를 이용해, 북이탈리아의 스페인령 밀라노에서 룩셈부르크까지 병력을 해상 봉쇄의 위험 없이 육로로 수송할 수 있었다.

사보이 공국 (중계·우호국)

프랑슈콩테 (합스부르크 직할령)

로렌 공국 (친스페인 정책 유지)

신성로마제국 내 친합스부르크 제후들

이 통로는 1567년 알바 공의 부대가 첫 진군할 때 사용되었고, 이후 1610년까지 40여 년간 스페인 테르시오의 전략적 생명선으로 기능하였다. 네덜란드 독립군은 이 통로를 차단하지 못하는 한, 계속해서 투입되는 정예 스페인 육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초반 전쟁에서 전략적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maurice_and_battle_of_niewupoort.png 그림 5 (왼쪽) 마우리츠의 초상화, 미힐 얀손 판미레펠트 유파의 익명 화가 작, (오른쪽) 니우포르트 전투의 마우리츠, 파울루스 판힐레하르트 1세 작.

침묵공 빌럼의 아들 마우리츠(1567–1625)는 네덜란드 군제의 구조적 개혁을 추진하여, 테르시오 중심의 중세적 군제와 차별화된 근대적 분대 전술, 훈련 표준화, 작은 유닛 단위의 화기 조합을 확립하였다. 이 군사 혁신 덕분에 1590년대 이후 독립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현 네덜란드–벨기에 국경선에 해당하는 방어선까지 전선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기세를 올린 북부 주들은 마우리츠의 신중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남부 ‘탈환’을 요구했으나, 이미 남부 주들은 북부를 더 이상 동족으로 보지 않았고 마우리츠의 전술적 한계도 드러나면서 성과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통로가 지리적으로 중프랑크 왕국의 축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중프랑크 왕국은 유럽 중심부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회랑을 형성했고, 부르고뉴 복합국은 이 회랑의 북부를 정치·경제적 단일 권역으로 재편했다. 부르고뉴 복합국과 이베리아 왕국과 이탈리아 일대를 결합한 합스부르크 스페인 제국은 같은 회랑을 이용해 군사적 보급선을 구축했고, 이것이 바로 스페인 통로다.

즉, 스페인 통로는 스페인이 해상 봉쇄하에 놓여도 북유럽 전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제국 전략의 핵심 인프라였다. 이 통로는 스페인 제국이 부르고뉴 복합국의 상속자였음을 가장 명확하게 시각화해 준다. 당대의 아무도 중프랑크 왕국을 의식하지 않았으나, 지정학은 다시 중프랑크 왕국을 불러내었다.


장기간 이어진 전쟁은 스페인과 네덜란드 양측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1609년 4월 9일 ‘12년 휴전’을 통해 양측은 전투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사실상의 독립 상태를 묵인하고 휴전에 동의했으며, 이는 스페인에는 중대한 후퇴였다.

휴전의 결과, 저지대 지역은 북부의 네덜란드 공화국과 남부의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분할되었다. 북부 공화국은 중세 이래 통합된 저지대 정치체가 부재했던 상황에서 처음 등장한 ‘저지대인의 독자적 국가’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전쟁 중 네덜란드 지도층은 외국 군주를 초빙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의 마티아스, 프랑스의 앙주 공 프랑수아, 잉글랜드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등 누구도 안정적인 통치를 확립하지 못했다. 결국 각 주의 대표가 참여하는 주 의회(States-General)가 통치권을 행사하고, 스타트하우더(Stadtholder)가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공화정이 확립되었다.


스페인 통로의 차단과 전쟁의 종결

Holy_Roman_Empire_1648.svg.png 그림 6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 네덜란드 연합주(United Netherlands)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외부로 표시되었다.

휴전이 끝났을 때 유럽은 이미 30년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전쟁의 도화선은 1618년 프라하 창문투척 사건이었고, 이어 보헤미아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왕을 폐위하고 독일 서부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팔츠 선제후가 개신교 동맹의 맹주가 되면서 가톨릭 동맹을 후원하는 스페인과 개신교 동맹을 후원하는 네덜란드는 다시 충돌하게 되었다. 팔츠 선제후국은 스페인 통로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스페인 통로를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했다. 네덜란드 역시 팔츠를 지원하면서 전쟁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스페인의 육상 보급로를 압박하고, 나아가 스페인 통로를 끊으려는 전략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와 팔츠에서 모두 축출되면서 개신교 진영의 패색이 짙었고, 이는 네덜란드 전황에도 반영되어 1625년 요충지 브레다가 스페인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가 전쟁에 개입하면서 개신교 진영은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정적 전환점은 1635년 프랑스가 전쟁에 직접 참전한 이후였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가장 큰 위협인 스페인 통로를 차단했고,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병력을 집중하느라 네덜란드 전선의 중요성이 후순위로 밀려났다. 이 틈을 타 네덜란드는 1637년 브레다 요새를 탈환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공격하는 한편, 1621년 설립한 서인도회사를 통해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적극적인 공세를 전개했다.

1648년 1월, 프랑스의 중재 아래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뮌스터 조약을 체결했고,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국제법적으로 공식 인정했다. 이어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부르고뉴 제국관구와 신성 로마 제국 질서에서 제외되었으며, 유럽 국제 체제에서 주권 국가로 인정받았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종교·경제·사회적 요인에서 촉발되었으나, 그 지속과 결과를 결정한 변수는 스페인 통로였다. 스페인 통로가 유지되는 동안 전쟁은 지속되었고, 통로가 차단된 순간 제국 전략은 붕괴하였다. 스페인 통로는 스페인 제국을 유지하던 실제적 ‘혈맥’이었다.

이 혈맥이 관통한 공간은 중세의 중프랑크 왕국이 남긴 회랑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종결은, 지정학적으로 보면 그 회랑의 짧은 부활이자 소멸이었다.


그림 출처

그림 1: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illiam_I,_Prince_of_Orange_by_Adriaen_Thomasz._Key_Rijksmuseum_Amsterdam_SK-A-3148.jpg), 퍼블릭 도메인.

그림 2: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achtigjarigeoorlog-1576-1577.png), Stuntelaar, CC BY-SA 3.0.

그림 3: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ederlanden_1579.PNG), Nederlandse Leeuw, CC BY-SA 3.0.

그림 4: 자작 CC BY-SA 4.0.

원본 그림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iddle_Francia_843.svg), Alphathon, 원본: Blank map of Europe (with disputed regions).svg, maix,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lank_map_of_Europe_(with_disputed_regions).svg), maix, 원본: Europe countries.svg, Júlio Reis,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urope_countries.svg), Júlio Reis,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aminoEspa%C3%B1ol.svg), Miguelazo84, rowanwindwhistler, CC BY-SA 4.0.

그림 5: (좌)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chool_of_Michiel_Jansz._van_Mierevelt_001.jpg), 미힐 얀손 판 미레펠트(Michiel Jansz. van Mierevelt) 유파의 익명 화가 작, 1607년, 퍼블릭 도메인. (우)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rins_Maurits_in_de_Slag_bij_Nieuwpoort,_2_juli_1600,_SK-A-664.jpg), 파울루스 판 힐레하르트 1세(Paulus van Hillegaert (I)), 1632-1640년경. 퍼블릭 도메인.

그림 6: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oly_Roman_Empire_1648.svg), Astrokey44,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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