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5)
생존을 위해 도적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 눈썹을 붉게 물들인 적미. 경시제는 그들에게 땅을 약속하고 주지 않았다. 살 길이 막막해진 적미는 결국 경시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경시정권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며 장안 코앞까지 들어왔다.
전한과 후한 사이, 짧게나마 다시 일어난 한나라가 있었다. 그 황제는 경시제 유현, 후한을 세운 광무제의 팔촌 형이다. 농민 반란군 녹림군에서 한나라의 황제로 추대되었고, 녹림군이 신나라를 무너뜨리면서 한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각지에는 경시제의 명령을 듣지 않는 독립 세력들이 할거했고, 공신들은 이성 제후왕에 봉해져 각지에서 경시제를 무시하며 독단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지방 관직은 교착되었고, 공신들의 횡포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경시제가 봉한 양왕 유영과 소왕 유수도 경시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농민 반란군, 적미가 본격적으로 경시정권의 심장에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신나라 말기, 폭정과 기근, 행정 체계의 붕괴로 생활 기반을 잃은 백성들은 대거 유랑민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폭력을 택하며 도적이 되기도 했다. 경시제를 옹립한 녹림군 역시 이러한 유랑민 출신의 도적 무리에서 출발했는데, 그보다 먼저 나타난 도적 집단이 바로 적미였다.
적미는 기원후 18년 청주(靑州)·서주(徐州) 일대에서 기근 속에 일어난 여러 도적 무리의 융합체였다. 문맹이었으나 용맹한 번숭(樊崇)을 필두로 방안(逄安), 서선(徐宣), 사록(謝祿), 양음(楊音) 등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 중 서선은 역경(易經)에 밝은 옥리 출신으로 집단에 드문 지배 계급 출신이었다.
또 하나의 연원이 된 세력은 기원후 17년 일어난 여모(呂母)의 무리였다. 여모는 기원후 14년 신(新)나라 관리에게 작은 실수로 아들을 억울하게 잃자, 여러 해를 걸쳐 자신의 전 재산을 풀어 협객을 모아 그 관리를 처단한 인물이다. 여모는 복수 후에도 무리를 해산하지 않고 바닷가에 은거했는데, 그녀가 죽자 그 잔여 세력 중 적지 않은 무리가 적미에 합류하였다.
여모·번숭·방안 모두 전한 초기의 거대 제후국이었던 제(齊)나라 인근의 낭야군 출신이었다. 이들의 영향 속에서 적미는 자연스럽게 제나라 지역의 고유한 민간신앙, 곧 성양경왕(城陽景王) 유장(劉章)을 모시는 신앙을 받아들였다. 유장은 고조 유방의 손자이자 여씨와 싸워 한실(漢室)을 지켜낸 영웅이지만, 형 유양을 황제로 세우려던 시도가 좌절된 까닭에 ‘한실에 대한 충성'과 동시에 '한실 내부에서 배제된 억울함’이라는 이중적 상징을 지닌 인물이었다.
성양국의 왕자들은 추은령에 따라 성양국과 그 인근에 봉토를 나눠 받아 제 지역 각지로 흩어지면서 제사 전통을 퍼뜨렸다. 이렇게 본디 성양국 종실의 조상 제사에서 출발한 성양경왕 신앙은 성양경왕이 지닌 이중적 상징성과 결합하며 제나라 지역의 민간신앙으로 정착했다. 적미 역시 이러한 전통의 영향을 받아, 군중에 항상 성양경왕을 제사 지내는 무당을 두었다. 훗날 적미가 황제를 옹립할 때에도 성양강왕의 증손 유분자를 신탁에 따라 세웠을 정도로, 적미와 성양경왕 신앙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적미는 수만 명 규모로 성장하며 여러 차례 신나라의 진압군을 크게 격파했지만, 경시정권으로 발전한 녹림과는 달리 하나의 정치적 목표나 장기적 이상을 갖지 않은, 생존 기반의 집단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적미가 거대한 규모로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붉은 눈썹이었다. 궁핍한 농민 도적에게 공통의 군복을 갖출 여유는 없었고, 피아식별을 위해 눈썹에 붉은 물을 들인 데서 ‘적미(赤眉)’라는 이름이 생겼다. 둘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단순한 동해보복 규율이었다. 복잡한 법과 문자를 모르는 이질적인 집단이 섞인 상황에서 ‘살인은 살인으로, 상해는 상해로 갚는다’는 간결한 규범은 조직의 해체를 막는 최소한의 질서였다. 마지막으로 성양경왕 신앙이 있었다. 지역적으로 공유된 이 신앙은 적미에게 상징적 연대와 의례적 통일성을 제공하며, 집단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다.
녹림과 적미는 모두 농민 반란군에서 출발했지만, 녹림은 경시제를 옹립해 중앙정권으로 변모하며 전국 질서 회복을 지향한 반면, 적미는 제 지역의 신앙과 향민 공동체에 뿌리를 둔 지역 세력이었다. 경시정권의 지속 가능성은 이런 지역 공동체의 요구를 얼마나 포섭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약 중앙정권과 지역 공동체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그것은 누가 승리하든 국가 질서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리고, 경시정권은 결과적으로 이 최악의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
신나라가 망한 것이 23년의 일인데, 이는 적미가 일어난 지 5년(여모 세력은 6년)이 지난 후다. 그만큼 적미는 장기간 존속하면서도 이렇다 할 정치적 야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녹림이 경시제를 옹립하고 신나라를 무너트린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경시제가 낙양에 도읍을 두고 있을 때, 조정은 적미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번숭 등 지도자들은 이를 받아들여 군사를 원래의 진영에 남겨둔 채 낙양으로 올라가 경시제로부터 열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경시정권은 혼란하여 이들에게 실제 봉읍을 마련해 주지 못했고, 그 사이 적미군 내부의 결속은 빠르게 흔들렸다. 지도부가 비어 있는 사이 구성원 일부는 흩어지고, 남은 자들도 배신과 이탈이 이어졌다.
이를 견디지 못한 적미의 우두머리들은 낙양에서 탈출하여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력 분화가 일어났다. 낭야군 출신 번숭·방안이 한 무리를 이루고, 동해군 출신 서선·사록·양음이 또 다른 무리를 이루어 예주 영천군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번숭·방안은 영천군 장사현(현 허난성 창거시)을 함락한 뒤 형주 남양군 완현(현 허난성 난양시)까지 남하하여 현령을 참수했고, 서선·사록·양음은 영천군 양책현(현 허난성 위저우시)을 함락한 뒤 하남군 양현(현 허난성 루저우시)을 공격해 하남태수를 죽였다.
이 사건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했다 하더라도 완과 낙양은 모두 한때 경시정권의 서울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장관들이 적미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피살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적미의 행적을 중점적으로 서술하는 《후한서·유분자전》에만 등장할 뿐, 정작 경시제의 붕괴를 다루는 《후한서·유현전》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경시정권의 지방 통제가 이미 와해되어, 옛 서울의 관장이 피살되는 일조차 더 이상 정국을 바꿀 만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경시정권은 완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최초로 신나라의 한 군(郡) 규모 군단을 무찌른 비수와 극수 사이의 전투에서 유연이 편제한 육부병을 완왕 유사에게 맡겨 완에 주둔하게 했다. 이 육부병은 유연이 하강·신시·평림·용릉 등 여러 부병이 모인 녹림군을 재편성한 조직으로 출신에 상관없이 한 부흥을 위해 하나로 구성한, 경시정권 최초의 정규군이자 중앙군으로 볼 수 있는 군단이었다. 그러나 《후한서·안성효후사전》에서는 경시제가 패한 후 육부병도 유사를 배반하고 흩어져 유사도 완을 포기하고 육양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육부병이 유사를 배반하고 흩어진 시점이 적미가 완을 격파했을 때인지, 나중에 서술할 경시제가 적미에 항복한 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유사와 육부병이 완으로 쳐들어온 적미를 막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완왕의 위엄도, 육부병의 무력도 무의미해진 것이다. 이렇게 경시제의 세력을 지탱하는 받침대 하나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경시정권의 중앙군조차 실질적인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경시정권의 붕괴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한의 역사가 저소손은 진승·오광의 난을 두고, 이들에게 특별한 능력은커녕 비천한 신분, 보잘것없는 농기구, 소수의 유배군밖에 없었음에도 이 농민 봉기군이 진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던 이유는 이미 진나라가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경시정권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통치의 기반이 해체되고 있었고, 적미의 침공은 그 붕괴를 최종적으로 드러낸 데 지나지 않았다.
적미는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했지만, 구성원들은 이미 6-7년 가까이 유랑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고, 고향인 제 지역을 떠나 타지에서 계속 싸우고 있었다. 전투 피로와 향수는 들불처럼 퍼져 나가, 많은 이들이 싸움을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번숭 등 지도부는 이 정서를 되돌릴 방법은 오직 하나, ‘더 큰 목표’를 제시해 무리를 다시 하나로 묶는 것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목표란 바로 장안의 경시 조정이었다.
완과 양은 각각 장안으로 돌입하는 관문인 무관(武關)과 육혼관(陸渾關)으로 통했다. 적미의 두 갈래 군은 겨울 음력 12월 이 관문들을 모두 함락했다. 앞서 말했듯이 완과 무관을 방비해야 할 유사와 육부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유사 외에 남방의 모든 상벌을 주관하는 권한을 받은 남양태수 대행 왕상(王常)도 마찬가지였다.
육혼관은 홍농군 육혼현(현 허난성 쑹현)에 있는 관문으로, 적미가 낙양을 우회해 장안으로 진격하는 동안 낙양에 있던 무음왕 이일(李軼), 늠구왕(廩丘王) 전립(田立), 대사마 주유(朱鮪), 백호공(白虎公) 진교(陳僑), 그리고 죽은 하남태수 대신 임명된 새 하남태수 무발(武勃) 등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소왕에 봉해졌으나 경시제의 귀환 명령을 거부한 유수와 맞선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이미 두 장관을 죽이고 관중으로 들어오는 두 관문을 뚫는 적미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아무도 없던 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닌 듯하다. 이즈음 경시정권은 이미 공신들의 횡포로 황제의 권력은 지방을 통제하지 못했으며, 이 지방을 다스리는 공신들도 서로 관할 구역을 나누고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산동은 이일과 주유 등이, 관중은 왕광과 장앙 등이 맡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남군의 영역인 양을 막는 것까지는 이일과 주유의 관할 범위였으나, 적미의 진군이 예상 외로 빨라 장안을 방어하는 관문이 있는 홍농군까지 들어온 것이다. 이일·주유 등은 ‘관중 가는 길이니 왕광과 장앙의 몫’, 왕광과 장앙은 ‘하남군을 거치니 이일과 주유의 몫’이라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적미가 관중으로 들어가자, 유수도 이를 기회로 여기고 등우(鄧禹)를 파견해 낙양을 우회해 관중을 노렸다. 왕광과 장앙도 등우를 막기 위해 하동군으로 출진했다. 경시 정권의 중신들이 자신이 핍박했던 유수의 귀환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적미를 막는 움직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경시정권의 굼뜬 움직임을 더 더디게 만든 존재가 있었다. 경시제 유현을 포함해 조정에서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던, 혹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이름. 그 이름은 유영(劉嬰), 바로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였다.
24년, 적미가 하남군 양현을 공격해 하남태수를 죽임.
24년, 적미가 남양군 완현을 공격해 완현 현령을 죽임.
24년 겨울 12월, 적미가 무관과 육혼관을 함락하고 관서로 돌입함.
24년, 유수가 등우를 관중으로 파견. 왕광과 장앙이 방어를 위해 하동군으로 출진.
24년, 유수가 풍이를 하내로 파견, 낙양의 이일·주유·진교·전립·무발과 대치.
적미는 제나라 지역 유랑민 기반의 대규모 도적 집단이었으며, 붉은 눈썹·동해보복율·성양경왕 신앙 같은 느슨하지만 강한 결속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경시제는 적미 우두머리들에게 열후를 내렸으나, 봉토를 주지 않아 이들은 다시 경시정권을 적으로 돌렸다.
경시정권의 중신들은 적미를 막지 못했고, 막지 않았으며, 그 결과 적미는 장안을 지키는 두 관문(무관·육혼관)을 손쉽게 돌파했다.
이런 와중에도 조정은 유수를 방비하는 데만 집착해 스스로 국력을 분산시키고 붕괴를 재촉했다.
그림 1: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5%8A%89%E7%AB%A0_(%E5%9F%8E%E9%99%BD%E7%8E%8B).jpg , 像取自清光绪修《安徽桐城刘氏宗谱》, 퍼블릭 도메인.
그림 2: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Xin_dynasty_people%27s_rebellion.png, Jason22,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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