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6)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유자영을 황제로 옹립하는 세력이 일어났다. 경시제 정권은 점차 쇠퇴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경시제는 점차 공신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한과 후한 사이, 짧게나마 다시 일어난 한나라가 있었다. 그 황제는 경시제 유현, 후한을 세운 광무제의 팔촌 형이다. 농민 반란군 녹림군에서 한나라의 황제로 추대되었고, 녹림군이 신나라를 무너뜨리면서 한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각지에는 경시제의 명령을 듣지 않는 독립 세력들이 할거했고, 공신들은 경시제의 권위를 우습게 여겼으며,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녹림보다 먼저 일어난 농민 반란군 적미는 경시제에게 투항했으나, 경시제가 그들을 돌보지 않자 경시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완현 현령과 하남태수를 죽이고 관중으로 들어온 적미의 다음 목표는 경시제가 거하는 장안이었다.
경시제의 위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영, 이른바 유자영(孺子嬰)이 불씨가 되었다.
군사(軍師)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사령관 밑에서 군기(軍機)를 장악하고 군대를 운용하며 군사 작전을 짜던 사람”, 더 나아가 “책략이나 수단을 교묘하게 잘 꾸며 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한다. 중국 고전 소설들을 접한 사람들에게는 제갈공명, 장량 등의 유명한 책사들을 떠올릴 것이며, 역사적으로도 제갈공명은 실제로 군사중랑장이라는 직임을 맡은 적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친숙한 호칭인 ‘군사’가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시점이 바로 후한 초 농서 지역의 군벌 외오(隗囂, 통상 ‘외효’로 읽으나 《후한서》 주석에 따라 여기서는 ‘외오’로 적는다)의 막료 방망(方望)에게서라는 것이다. 외오는 방망을 초빙해 군사로 임명했는데, 이것이 직명으로서 ‘군사’라는 단어가 확인되는 가장 이른 사례로 알려져 있다.
방망은 외오가 신나라 태수를 축출하고 농서에서 자립하자 곧바로 ‘정통성의 재설치’를 진언했다. 그는 경시제가 남양에서 즉위했으나 장안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무소수명(無所受命)”, 즉 정통성의 근거가 허약하다고 보고, 고조의 사당을 세워 의례를 갖추는 것이 한 부흥의 대의명분을 확립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방망이 외오에게 기대한 바는 상나라 이윤·주나라 여상처럼 왕조를 여는 창업보좌의 역할에 가까웠다. 이러한 비전은 25년 외오가 경시제의 부름을 받고 입조하려 할 때 방망이 강력히 반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후한서·외오열전》에서 전하듯 그는 경시정권의 장래를 신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오가 일으키려던 ‘이여지업(伊呂之業)’이 창업의 시기에서 중단되는 것을 우려하여 외오를 떠나게 된 것이다.
방망은 혼란에 빠진 경시정권과 그 관료가 되어버린 외오에게서 기대를 거두었지만, 애초 외오에게 “보한이기(輔漢而起)”를 권했던 것처럼 한나라 부흥이라는 목표 자체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던 방망이 마침내 눈을 돌린 대상이 바로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자영이었다.
유자영은 한나라 선제의 현손이며, 선제의 태자 원제의 동생 초효왕 유오의 증손이다. 원제의 마지막 후손인 평제가 기원후 5년 전권을 쥐고 있던 왕망에게 독살되어 원제의 핏줄이 끊기자, 왕망은 선제의 다른 현손들 중 아직 2살에 불과한 유영을 택했고, 아직 어리다 해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 곧 유자(孺子)로 세웠다. 그러면서 자신은 ‘섭황제’가 되어 사실상의 군주가 되었다. 9년, 왕망은 기어이 한나라를 폐하고 신나라를 새로 세웠고, 유자영을 정안공(定安公)에 봉했다. 그러나 왕망은 유자영을 봉지에 보내지 않고 장안에 머물게 하면서, 유모가 말조차 걸지 못하게 하고 사면 벽 안에만 가두어 두었다. 《한서》에서는 유자영이 “여섯 가지 가축의 이름조차 모르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법제상 유영은 평제의 적통 후계자로 지명된 인물로,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한 황실의 정통 황제가 되었을 사람이었다. 혈통과 계승 법통만을 기준으로 보면, 그는 경시제·광무제·양왕 유영 같은 방계 출신 황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직계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경시제 정권이 세워지고 신나라가 무너지는 격변 속에서도, 유영은 장안의 궁정 어딘가에 사실상 방치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방망은 이 유영이 바로 황제 자리에 올라야 할 인물이라고 보고, 안릉 사람 궁림(弓林) 등과 뜻을 모아 장안에서 유영을 찾아냈다. 다만 장안은 경시정권의 수도였으므로, 이들은 유영을 데리고 장안을 빠져나와 옛 외오의 세력권이었던 안정군 임경현(현 간쑤성 전위안현 소재)으로 옮겨 그곳에서 황제로 옹립했다. 방망이 승상, 궁림이 대사마를 맡았고, 그 기치 아래 수천 명이 모여들어 하나의 군벌 정권을 이루었다. 25년(경시 3년) 음력 1월의 일이었다.
이즈음 경시정권은 각지에서 난립한 세력들 중에서도 특히 두 적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경시제에게서 소왕(蕭王)에 봉해졌으나 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하북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광무제 유수였고, 다른 하나는 경시제의 지방 장관들을 죽이고 관중을 넘보는 적미였다. 그러나 유수도 아직 황제를 일컫지 않았고, 적미 역시 경시제를 타도한다고 선언은 했으나 아직 나라의 꼴을 갖추지는 못한 대규모 유랑 반군에 가까웠다. 그런 점에서, 비록 따르는 무리가 수천 명에 불과할지언정 왕망이 폐한 황태자 유자영을 황제로 옹립한 방망 세력의 책동은 정통성 면에서 경시제에게 가장 거슬리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관중을 맡은 장앙과 왕광은 유수를 막으러 하동으로 가 있었는지라 바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결국 경시제에게 남아 있는 힘만으로 유자영과 싸워야 했다. 경시제는 승상 이송, 토난장군 소무(蘇茂)에게 이 일을 맡겼다. 별도로 태상장군(太常將軍)·정도왕(定陶王) 유지도 유영 토벌에 나서게 했다. 선제의 마지막 후계자인 유자영을 광무제·경시제 집안, 곧 용릉후의 적손인 유지가 공격하는 장면은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방망 세력은 호기롭게 유자영을 황제로 세웠으나, 병력은 너무 적었고 장안을 피해 옮겼다고는 해도 임경은 장안과 너무나 가까웠다. 이송 등이 지휘하는 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망 세력을 격파했고, 유자영·방망·궁림 모두 참수되었다. 옹립과 참수가 모두 음력 1월의 일로 기록될 정도로 짧은 기간에 맞이한 허무한 최후였다.
유자영은 왕망에게 이용되었고, 왕망의 감금이 끝난 뒤 경시제의 시대에도 두드러진 존재로 부각되지 못한 채 조용히 지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 시기가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때였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방망이 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황제로 끌어올렸지만, 왕망의 의도적인 격리와 방임적 양육으로 인해 인지적·사회적으로 온전히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설령 방망의 계획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유자영 본인에게는 더 큰 곤란과 위험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방망 자신은 진심으로 유자영을 받들어 한나라를 부흥시키려 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자영의 처지에서 본다면, 그 모든 명분은 결국 자신을 다시 권력의 전면으로 끌어내어 희생양으로 삼는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방망의 야심은 오히려 그를 한 번 더 괴롭게 만든 꼴이었다.
그럼에도 유자영이 황제가 된 이 사건은, 식자층 내부에서 이미 경시제 정권의 앞날을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방망에게는 한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자기 나름의 복한(復漢) 구상이 있었다. 그는 녹림 제장들과 공신 세력을 등에 업은 경시제 아래서 공신이 되는 길보다, 구중궁궐에 고립된 꼭두각시 옛 황태자 유자영을 굳이 찾아내 황제로 세우는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정권의 명분과 진로를 근본부터 의심한 인물이었다.
임경현은 본래 외오의 세력권이었고, 방망 역시 한때 외오 휘하의 군사였다. 이 무렵 외오는 경시정권에서 어사대부라는 고위 관직을 맡고 있었지만, 방망의 거병과 관련해 그의 움직임은 사료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임경이 자신과 깊이 연이 있는 지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외오가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곤란을 겪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후 외오는 경시제의 공신들이 장안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나려는 계획에 가담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 무렵의 외오는 농우·하서의 군웅이라기보다는 경시정권의 다른 공신들과 비슷한 궤도로 움직인 셈이다. 정권 바깥에서 독자 세력을 도모하기보다는, 경시정권을 위해 일하면서 그 체제 안에서 입지를 굳히는 쪽을 자신의 진로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방망이 임경현으로 가서 반(反) 경시제 거병을 일으켰으니, 경시제나 조정의 다른 신하들이 한때 방망을 군사로 썼던 외오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임경현이 본래 외오의 세력권임에도 불구하고, 유자영 토벌군의 지휘에서 그가 빠져 있는 점 역시 이런 의심의 연장선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물론 외오가 훗날 다른 공신들과 함께 장안을 이탈하는 모의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것을 보면, 어느 시점엔가 방망과의 관계를 해명하고, 경시제 공신 집단의 일원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성공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은 경시제에게 하나의 작은 계기가 되었다. 그간 경시정권에서는 공신으로 봉해진 이성 제후왕들이 경시제보다 앞에 나서 관중과 산동을 사실상 분할 통치하고 있었고, 경시제는 이름뿐인 황제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들이 하북의 유수와 관중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미 같은 더 큰 위협에 대처하느라 황제 곁을 오래 비우게 되자, 경시제는 자신에게 직접 연결된 신하들을 동원해 소규모나마 반란을 친히 진압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군권을 직접 행사해 본 경험은, 경시제 스스로에게 점차 ‘온전한 황제’로 거듭날 수 있다는 감각을 쌓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미의 위협이 눈앞으로 다가온 바로 그 시점에, 경시제가 공신들 뒤에 서 있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스스로 군권을 행사하는 황제로 자리매김하려 한 움직임은, 경시정권 전체로 보았을 때는 오히려 재앙의 징조였다.
외오의 군사를 맡아 다시 한을 세우고자 한 방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경시정권이 혼란해지자, 외오를 떠난 방망은 왕망이 폐한 마지막 전한의 황태자 유영을 외오의 세력권이었던 임경현으로 데려가 황제로 세웠다.
경시제는 승상 이송 등을 보내 유영과 방망 등을 베어 빠르게 사태를 진압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시정권의 쇠퇴를 보여준 것이었고, 공신들이 유수와 적미를 막는 동안 경시제가 독자적으로 군권을 행사한 경험은 정권에는 재앙의 시작이 되었다.
그림 1·2·3·4, Google Gemini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