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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제의 뒤늦은 깨달음

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7)

by 이원규

적미와 유수에게 연전연패하며 장안으로 몰려든 공신들. 그 앞에 선 것은 더 이상 꼭두각시 황제가 아닌, 진정한 통치자로 거듭나려 한 경시제였다.


지금까지 이야기

전한과 후한 사이,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잠깐 들어선 또 다른 한나라가 있었다. 그 한나라의 황제는 광무제의 팔촌 형인 경시제 유현이었다. 공신들에게서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져, 큰 전공을 세운 광무제와 그 형을 누르고 추대되었다.

그러나 공신들은 권력을 제멋대로 나눠 가지고 횡포를 부렸고, 백성들의 삶은 다시 도탄에 빠졌다. 각지의 군웅들은 다시 경시제에게서 벗어났고, 농민 반란군 적미는 공신들의 방위 체계를 허물고 경시제가 있는 장안을 목표로 진격하고 있었다.


각개격파당하는 경시정권

그림 1 25년 무렵 적미·경시·유수 군의 동향.

적미의 위협은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경시제는 유자영 토벌에서 공을 세운 소무를 급히 홍농으로 보내 적미를 요격하게 했으나, 사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삼천 명을 잃고 패퇴했다고 한다. 이어 3월에는 승상 이송을 낙양의 주유와 합류시켜 홍농군 모향에서 다시 적미를 막게 했지만, 이때는 무려 삼만의 손실을 기록한 대참패를 겪는다.

한편 낙양 방면도 사정이 전혀 여유롭지 않았다. 하남태수 무발은 유수 휘하의 장수 풍이에게 패해 참수되었고, 무음왕 이일은 풍이의 꾐에 빠졌다가, 이를 눈치챈 주유에게 오히려 살해당했다. 경시제는 결국 소무를 다시 주유에게 보내 하남 전선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소무는 주유와 함께 공세에 나서 자신은 온현(溫縣)을, 주유는 평음현(平陰縣)을 공격했지만, 소무는 구순에게, 주유는 풍이에게 차례로 격파당했고, 그 결과 낙양은 여타 경시제 군과 고립되어 유수 군에게 포위되는 처지에 놓였다.

유연을 죽이고 공신 제후왕 책봉을 반대해, 녹림 제장 중에서는 그나마 진정으로 경시제를 위해 일하려 했던 주유는 경시제가 패망할 때까지 낙양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왕광과 장앙은 홍농과 하동 방면을 맡아, 한편으로는 적미를 막고 한편으로는 유수가 보낸 등우의 군대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겉으로는 유수에게 “호왈 십여만”을 자랑하는 대군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적미의 거센 진군 앞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발이 묶여 있었다. 그나마 등우라도 붙들어 두고 있었다면 방어선으로서 의미가 있었겠지만, 기나긴 대치 끝에 결국 음력 6월에 등우에게 패해 장안으로 패주하고 만다.

후한서에 따르면, 낙양 방면의 주유·이일·무발·진교·전립 등이 거느린 병력이 30만, 홍농·하동 방면의 왕광·장앙이 이끄는 군대가 10여만으로 기록된다. 숫자만 보면 경시정권은 관중과 하남 일대에 40–50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병력이 실제 전장에서는 각기 다른 지휘 체계 아래에서 제각각 움직였고, 적미의 관중 돌입을 저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연달아 패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수치는 실전 전투력을 가리키기보다는 ‘호왈 백만’식의 과장된 명목 인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숫자상으로는 수십만을 자랑하는 대군을 거느리고도, 경시정권은 적미와 유수 사이에 끼여 어느 한쪽도 제압하지 못한 채 각개 격파를 거듭했다. 경시제가 뒤늦게 황제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려 한 움직임은, 이런 구조적 취약성을 되돌릴 수 있을 만큼의 시간도, 여유도 허락받지 못했다.


네 명의 황제들

그림 2 왼쪽부터 적미와 유분자, 경시제, 공손술, 유수의 상상화.

그러나 경시제 측의 저항도 작지는 않았다. 이송이 적미와 싸우다가 삼만의 손실을 겪었다는 것은 그만큼 전투가 격렬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적미도 빠르게 진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원래는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무리들을 억지로 잡아두기 위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수뇌부가 무리들을 이끌고 있었다. 연이은 승전으로 이 전략은 힘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투에 지친 무리들의 불만이 언제 터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적미는 승세를 타 홍농에서 더 많은 무리들을 모았다. 《후한서·유분자열전》에서는 당시 적미의 성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만 명씩 모아 한 진영을 삼았으니, 무릇 삼십 영이 있으며, 영마다 삼로(三老)와 종사 각 1명을 두었다.” 삼로는 한나라에서 군국의 자문에 응하는 지역의 유력자를 가리키는 말로, 적미를 결성한 번숭이 스스로 삼로를 일컬었고 이후 적미 무리들은 이를 본받아 우두머리를 삼로, 그 다음을 종사라 일컬었다.

이렇게 적미가 더 많은 무리를 모으고 세력을 정비하느라 진군이 늦어졌으나, 경시정권이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적미는 나아가 경조윤 화음현(현 섬서성 화이인시)에 주둔했다. 장안과 화음은 같은 경조윤 관할이었으니, 이제는 장안이 적미의 눈앞에 들어왔다.

적미는 성양경왕을 모시는 무당을 군중에 두었는데, 무당이 성양경왕의 신내림을 받아 황제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전에 유자영을 세웠다가 경시제에게 죽은 방망의 동생 방양도 적미 군중에 있어, 황제를 세워 경시제를 대신하라고 번숭에게 진언했다. 이런 이유로, 음력 6월에 더 나아가 정현(현 섬서성 웨이난시 화저우구)에 도착한 번숭과 적미 무리들은 성양경왕의 후손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 유분자라는 목동 소년을 황제로 모셨다.

또 같은 음력 6월에는 경시제와 맞서 싸우고 있던 유수 역시 호현(현 허베이성 바이샹현)에서 황제를 일컬었다. 이에 앞서, 4월에는 공손술이 황제를 일컬었다. 이제 중국에는 네 명의 황제가 일어났고, 경시제는 이들 중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였다.


경시정권과 경시제의 엇갈림

경시제 외에 유분자, 유수, 공손술, 세 명의 황제가 새로 세워졌고, 경시정권의 영향력은 급속히 후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글만 따라오다 보면 경시정권이 삼보(三輔)로 완전히 후퇴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직 병주의 포영(鮑永), 하서의 두융(竇融), 익주군의 문제(文齊) 등 경시제가 임명했거나 공손술·유수 등에게 포섭되지 않은 지방 세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중 경시제에게 충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인사는 포영이 거의 유일하며, 그나마도 병주로 세력을 확장하는 유수의 위협에 맞서야 해 관중을 구원할 여력이 없었다. 포영은 경시제가 패망한 후에 결국 유수에게 귀부했다.

두융은 경시제가 장액속국도위로 임명했지만, 경시제에게 충성한다기보다는 경시정권의 혼란을 피해 조상들이 대대로 관직을 맡은 하서에 몸을 의탁해 세력을 만들고자 하는 독자적 기반 마련 겸 피란이라는 동기로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신나라에서 임명한 익주군의 태수였고 한 군을 장악해 공손술에게 맞설 뿐 경시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신시병 출신 주유와 용릉병 출신 이일 등은 낙양에서, 다른 신시병 출신 왕광과 하강병 출신 장앙은 하동에서 패퇴했다. 녹림 출신 제후왕들의 강성하던 군사력은 쪼그라들었고, 유수와 유분자라는 두 황제가 세워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편 경시제는 방망이 옹립한 황제 유자영을 제거해 전한 황실의 마지막 잔재를 지우고 스스로 정통 황제의 권위를 세웠다. 심하게 제후왕 쪽으로 기운 경시제와 제후왕들의 권력 양팔저울은 잠시 균형을 찾는 듯했지만, 그 저울 자체가 삭아가고 있었다.


장안을 사수하려는 경시제

그림 3 장안을 지키려는 경시제와 남양으로 달아나자는 제후왕들의 대립 상상화.

등우에게 패퇴해 하동에서 장안으로 돌아온 왕광과 장앙. 그 중에서도 장앙은 당시의 위기를 타파할 대책을 제장들에게 제시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적미가 화음과 정 사이에 있으니 조석간에 곧 이를 것이다. 홀로 장안에 있다가는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이다. 성중을 약탈해 스스로 부하게 하고, 이곳저곳을 공격해 동쪽 남양으로 돌아가 완왕 등의 군대를 모으는 것이 낫다. 잘 안 되면, 호수와 못으로 돌아가 도적이 되면 될 뿐이다.

즉, 장안을 포기하고 관중 일대를 약탈해 경시 정권의 첫 서울인 남양으로 도망가자는 것이었다. 완왕 유사가 경시정권의 중앙군이라 할 수 있는 육부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이를 이용해 다시 세력을 떨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장안과 남양을 잇는 길을 방비하는 무관을 이미 적미에게 빼앗겼기에, 그 전에 완현 현령이 전사했고 유사는 속수무책이었다는 것까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평씨왕 신도건과 양왕·집금오대장군 요담 등은 장앙의 계획에 동의해 함께 경시제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이제 경시제는 제후왕들의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장앙·신도건·요담 세 제후왕들의 진언에 경시제는 분노해 거부하고, 이를 다시는 논하지 못하게 했다. 곧 적미가 유분자를 황제로 세웠다는 소식을 듣자, 경시제는 왕광과 음평왕 진목, 양읍왕 성단, 우대사마 조맹을 경조윤 신풍현에 주둔하게 하고, 이송은 신풍현 홍문정에 있는 추성에 주둔하게 해 적미를 막게 했다.

신풍현은 지금의 시안시 린퉁구로, 적미가 주둔한 웨이난시 화저우구와 사이에 웨이난시 린웨이구를 두고 바라보는 지척이었다.

진목은 대사공, 성단은 수형대장군으로 수도 운영과 정권 핵심부에 속한 내직 성격의 직위를 맡은 인물들이었다. 경시제가 이들을 전면 방어선에 동원한 것은, 내직 인력까지 군사적 방어 체제로 전환하여 장안의 관료 조직을 ‘사수’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읽을 여지가 있다.

정황상 방어 계획에서 장앙과 이에 동조한 신도건·요담의 이름이 빠져 있는 점 역시, 경시제가 ‘장안 사수’ 노선에 동의할 인물 중심으로 인선을 재정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유수가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간 입을 다물고 있던 어사대부 외오가 경시제에게 나아왔다. 경시정권의 국삼로이면서 유수의 숙부인 유량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진언에서 외오나 경시제나 비슷한 견해가 있었다고 추측한다면, 바로 기존의 공신 세력은 더 이상 정권을 맡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시제는 외오의 진언을 거부했으나, 이미 공신들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경시제가 공신들을 신임해서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오는 유수 세력이 이미 강성해졌음을 인정하고, 유수의 숙부에게 전권을 주어 유수와의 싸움을 그치고 협상하는 길을 열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경시제는 장차 유수에게 황제 자리를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 경시제가 이를 거부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경시정권의 세력은 이미 붕괴에 가까운 상태고, 장안도 오늘내일이 위태로웠다. 굳이 세력을 유지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훗날의 안전을 도모한다면, 장안을 위협하고 있는 두 세력, 적미와 유수 중에 항복했을 경우 경시정권의 인사들을 지켜줄 수 있는 쪽은 통치력이 있는 유수였을 것이다. 외오가 유량에게 정권을 맡기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황제의 자리를 내려놓고 살아남는 길을 택하는가, 진정한 황제가 되어 이 국난을 타개하겠는가? 경시제는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외오는 비현실적인 꿈을 품었다고 생각했는지, 뒤늦게 이제서야 경시제에게 실망했다. 옛 군사 방망이 경시정권의 난맥상을 이유로 경시제를 섬기지 말 것을 권유했을 때에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고 보았다. 그 판단이 틀렸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녹림의 음모와 경시제의 반격

그림 4 동제 의장봉을 든 집금오 상상화. 경시제는 집금오를 자기 사람으로 교체해 제후왕 세력에 반격했다.

이렇게 정권의 중심에서 밀려날 위기의식을 느꼈을 장앙·신도건·요담, 그리고 자기 조언이 무시당한 외오는 상서 호은까지 끌어들여 음모를 꾸몄다. 입추 날에 치르는 추루(貙膢) 제사에서 경시제를 협박해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경시제가 수도 장악력과 인사 주도권을 강화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정황이 보인다. 시중 유능경이 이 다섯 명의 음모를 경시제에게 알린 것이다.

경시제는 칭병하고 이 다섯 명을 불러들여 한꺼번에 다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외오만이 마찬가지로 칭병하고 소환에 불응한 채, 왕준·주종 등과 함께 병력을 거느리고 방비 태세에 들어갔다. 이때 사서에서는 중요한 전환이 드러난다. 본디 요담이 맡고 있던 수도 경비 직책인 집금오 자리가 복한장군 등엽(鄧曄)으로 바뀌어 있던 것이다. 경시제가 아마 다음과 같이 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오늘부로 양왕의 집금오를 거둬들인다! 새 집금오 복한장군 등엽! 어사대부 외오를 사로잡아라!”

경시정권의 중신들이 경시제를 여전히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 중 하나가 집금오 요담의 존재다. 요담은 이전에 경시제가 초야에 있을 때 몸을 의탁한 평림병의 대장이었기에, 수도를 경비하는 집금오 자리에 있으면서 기존에 쌓은 평림병 조직을 수도 경비 직함과 결합해 경시제를 제약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집금오가 요담에서 등엽으로 넘어가는 데에 저항이 두드러지게 기록되지 않는다는 점은, 적어도 경시제가 집금오 인사권을 실제 무력 동원으로 연결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전한에서 확립된 수도 경호·치안의 제도적 분업은 황제 근접 경호를 담당하는 낭중령, 궁성·궁문 방위를 담당하는 위위, 경사 순찰·도성 치안을 담당하는 집금오라는 세 축으로 설명된다. 경시정권에서는 이런 제도적 외형을 연합 정권의 권력 배분 논리에 맞게 재배열해, 장앙이 위위를 맡고 요담이 집금오를 맡아 경시제를 제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경시제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경시제는 집금오를 경질하고 수도를 방위하는 무력을 되찾아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료들을 공격하려 했다. 수도의 위험한 대신을 체포하는 것은 집금오의 직무 범위라 할 수 있으나, 황제가 자기 권한을 행사하는 데에 무력에 의존하는 상황은 무너진 권위를 폭력으로 되찾으려는 시도로, 정권을 내전으로 몰고 갈 위험을 안은 조치였다.

등엽은 녹림 출신은 아니고, 녹림에 호응해 우광과 함께 거병해 장안을 함락한 인물이었다. 경시정권에서도 그 공을 인정해 자칭 직함인 복한장군을 인정했으나 제후로 삼지는 않았다. 경시제는 녹림 핵심 공신들과는 다른 경로로 들어온 세력들을 중용해 자기 권력 기반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등엽은 북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외오를 포위했다. 외오는 문을 걸어닫고 버티다가, 황혼을 틈타 포위망을 뚫고 수십 기를 거느리고 달아나 관문을 지키는 병사를 베고 자신의 본거지였던 천수로 도망갔다. 그렇게 경시정권에서 중직을 맡아 한을 안정시키려고 했던 외오는, 다시 농서에서 군웅의 길을 걷게 된다.

외오와 등엽 모두 정통 녹림과는 다른 경로로 들어온 인사들로, 경시제에게서 각각 어사대부와 복한장군·집금오라는 중직을 맡았다. 그러나 외오는 다른 고관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녹림 출신 공신들과 함께 장안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달아나자는 계획에 가담했고, 등엽은 경시제의 수도 방위 구상에 따라 그런 외오를 체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장면은 경시제가 비(非)녹림 인사를 활용해 친위 기반을 구축하려고 한 성과와, 그럼에도 그런 인사들 중 일부는 다시 반 경시제 세력으로 넘어갔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외오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경시제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장앙 등 네 사람을 외려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변고를 직감한 장앙·요담·호은은 곧장 빠져나갔고, 신도건만 홀로 남아 소환을 기다렸다. 경시제는 그를 살려 두며 정국을 수습할 여지도 있었겠으나, 사태가 이미 폭로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신도건을 베었다.


경시정권 최후의 내전이 곧 막을 올린다.



연표

25년 봄, 소무가 홍농에서 적미에게 패배.

25년 음력 3월, 이송·주유가 홍농군 모향에서 적미에게 패배.

25년 봄, 주유·소무가 유수의 평음·온을 공격했으나 패배. 주유·소무, 낙양에 포위돼 고립.

25년 음력 4월, 촉왕 공손술이 성나라 황제로 즉위.

25년 음력 6월, 장앙·왕광이 하동에서 유수의 대장 등우에게 패배, 장안으로 도주.

25년 음력 6월, 적미가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

25년 8월 5일(음력 6월 22일), 유수가 황제로 즉위.

25년, 장앙·신도건·요담·호은·외오가 입추 때 경시제를 협박하기로 모의.

25년, 경시제가 외오를 공격, 외오 천수로 도주. 경시제가 장앙·신도건·요담·호은 소환, 신도건 처단. 장앙·요담·호은 도주.


요약

경시정권의 제후왕들은 각지에서 유수와 적미에게 패배해 장안으로 도주하거나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유수와 적미, 그리고 공손술은 스스로 황제를 일컬었다.

제후왕들은 장안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도주하자고 진언하고, 외오는 유수의 숙부 유량에게 정권을 맡기라고 간언했으나, 경시제는 이를 모두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장안 수비를 지휘했다.

왕들과 외오는 경시제를 납치해 함께 도주하려 했고 음모를 눈치챈 경시제가 자기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들과 외오를 죽이려 했다. 결국 외오와 왕들은 달아났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림 출처

그림 1: 中央研究院,《中華文明之時空基礎架構系統》第一版,(台北,2002年9月)。경시·적미·유수 동향은 글쓴이 편집/추가.

그림 2·3·4: Google Gemini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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