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알못과 《반 고흐, 영혼의 편지》
그런 날이 있다. 왠지 그렇게 하고 싶은 날. 그렇게 하니 어떤 운명 같은 일이 생기는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퇴근하고 인근 동네로 산책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탔다.
며칠째 가고 있는 양천 청년센터를 지나쳐 영등포 청년센터로 오랜만에 왔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챙겨왔지만 왠지 서가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여다 봤지만 혹시 놓쳤던 책이 있을까 하고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눈으로 훑는데
별안간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어떤 책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제목 그대로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엮어놓은 책이었다.
미술은 잘 알지 못하기도 하고 잘 하지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아서 관심 분야가 전혀 아니지만,
반 고흐는 워낙 유명한 화가인데다 고흐의 그림에 담긴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따뜻함은 좋아하기에
평소라면 꺼내어 보지도 않았을 그 책을 집어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책날개에는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실패한 후 화가의 길을 찾았다."라고 그를 소개하고 있었고
두 줄 아래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자살'.
생각해 보니 고흐는 자기 손으로 자기 귀도 잘랐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사람이라고,
그의 그림이 마치 취한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상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와 같은 생각을 해본 경험이 생긴 건 얼마 되지 않아서,
마침 오늘도 죽음에 대해 꽤나 진지하게 고민해본 날이어서 유독 저 문구가 마음에 꽂혔다.
고흐의 편지를 읽기도 전에 다소 무거워진 기분으로 진짜 그가 남긴 말들을 읽기 시작했다.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라는
첫 편지의 메시지부터 공감하며 한 장씩 넘기다가 다음 부분에서 잠시 책을 덮었다.
사람들 다 있는 이 훤한 공간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기 위해서.
네가 나를 쓸모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봐준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쓸모 없는 사람도 두 종류가 있다. 천성이 게으르고 강단이 없어서 정말 쓸모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고……. 나를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로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다른 종류의 쓸모 없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사람들이다. 일을 하려는 욕구로 불타지만 손이 묶여 있고 갇혀 있어서, 한마디로 어려운 환경이 그를 억눌러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지.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른다 해도 본능적으로 어떤 느낌이 있기 마련이지. 즉, 나도 그 무엇인가에 적합한 인물이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쓸모 있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이 도대체 무얼까? 그런 사람은 본의 아니게 쓸모 없는 사람이 된 경우다. 원한다면 나를 그 가운데 하나로 봐도 좋다.
새장에 갇힌 새는 봄이 오면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단지 실행할 수 없을 뿐이다. 그게 뭘까? 잘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는 알고 있어서 혼자 중얼거린다. '다른 새들은 둥지를 틀고, 알을 까고, 새끼를 키운다.' 그러고는 자기 머리를 새장 창살에 찧어댄다. 그래도 새장 문은 열리지 않고, 새는 고통으로 미쳐간다. "저런 쓸모 없는 놈 같으니라고." 지나가는 다른 새가 말한다. 얼마나 게으르냐고. 그러나 갇힌 새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잘하고 있고 햇빛을 받을 때면 꽤 즐거워 보인다.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p.24.
'쓸모 없음', 어제 퇴근길에 유튜브 강연을 들으며 생각했던 주제다.
어제뿐만 아니라 몇 달째 매일, 자면서도 스스로에게 '나는 쓸모 있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내게
고흐가 자신의 쓸모를 변명하는 이 편지는 더 이상 고흐가 테오에게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발신자는 나, 수신자는 나를 둘러싼 세상 그리고 나 자신인 편지가 되었다.
본인의 머리를 새장 창살에 찧는 새, 스스로가 만든 고통에 점점 미쳐가는 새,
그래도 살아남아 내면의 변화를 느끼고 햇빛을 받으며 즐거워 하는 새,
고흐가 말하는 '새장에 갇힌 새'는 고흐 그 자신이자 144년 뒤의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나다.
뒤이은 문단에서 "해방은 뒤늦게야 오는 법"이라고 말하는 고흐.
나보다 앞선 시대를 산, 나보다 앞서 고난의 길을 걸었던 그는 과연 해방을 맞이했을까?
"그래도 더 나은 변화가 온다면, 나는 그걸 얻은 것으로 생각할 테고,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드디어, 그래, 결국에는 뭔가 되고야 마는구나!" 하며 희망을 내비치던 그는 그 뭔가를 얻었을까?
미술에는 관심이 전혀 없던 내 눈에 오늘 이 책이 띈 건,
맨몸으로 나가려다 굳이 무거운 노트북을 이고 지고 나섰던 건,
답답한 미래에 숨쉬는 법도 잊고 고통스러워하던 요즘의 나에게
나보다 대단하면서 나와 비슷했던 누군가와의 시간을 초월한 만남을 주선해주고 싶었던,
그 만남으로부터 받은 위로를 활자로 뱉어내며 막혀 있던 숨을 트이게 해주고 싶었던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만들어낸 운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포기했을 지언정 나는 나에게 그래도 살아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