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77] <란 12.3>
월트 디즈니는 <환타지아>(1940년)를 만들면서 이야기도, 대사도, 해설도 없이 오케스트라와 이미지만으로 관객을 압도하겠다고 선언했다. 86년이 지나 이명세 감독이 비슷한 도박을 감행했다. 소재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2024년 12월 3일의 대한민국이었다. <란 12.3>은 그날 밤 22시 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부터 이튿날 새벽 1시 1분 국회의 해제 요구 결의안 가결까지를 96분으로 압축한 시네마틱 다큐멘터리다.
시민 283여 명의 영상과 사진, 65여 곳 의원실의 기록, 현장 기자와 유튜버들의 자료가 한데 뒤섞인다. 인터뷰도, 내레이션도 없다. 대신 조성우 음악감독의 오케스트라가 자리를 채운다. 화면의 흐름은 물론 군중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선율을 밀착시키는 미키마우징 기법은 일반 극영화 대비 약 3.5배의 작업량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음악은 분위기를 돋우는 장치가 아니라 관객의 심박수를 직접 조율하는 연출 언어가 된다.
오프닝부터 이 영화의 태도는 분명하다. 뉴스 화면 속 비상계엄 선언 장면 위로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막이 스르르 끼어든다.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조롱기 어린 시선으로 포착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어 무성영화의 자막처럼 찍혀나오는 텍스트들, 무장한 군인이 '딴지사옥' 건물 주변을 맴돌며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장면(이명세 감독이 연출 참여를 결심하게 만든 바로 그 이미지다)이 이어진다. 이명세 감독은 총을 멘 군인의 눈빛에 응축된 공포와 불안을 붙잡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후 영화는 야당 대표의 라이브 방송, 경악하는 유튜버들의 반응, 국회로 달려드는 시민들의 고함소리, 본회의장에 집결한 국회의장과 의원들의 초조한 생방송 대화를 쌓아나가며 그날 밤의 긴장을 재구성한다. <란 12.3>의 형식적 야심은 실제 푸티지와 재현 장면, 이강훈의 일러스트, AI 이미지, 애니메이션을 뒤섞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시민들이 국회로 달려가는 장면을 히어로 코믹스처럼 표현하고, 계엄군의 행진은 마치 <스타워즈>의 '스톰 트루퍼'를 떠올리게 한다.
이명세 감독은 "그날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주 충실히 드라마타이즈하기로 했다. 소위 정치 고관여층이 아닌 사람이 보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고 밝힌 바 있다. 조성우 음악감독 역시 "이명세 감독과는 하나의 예술적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의 합류 역시 선택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라고 전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협업이 다큐멘터리라는 낯선 형식 안에서 다시 맞닿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이 형식적 야심 안에 <란 12.3>의 균열도 있다. 실제 푸티지가 그날 밤의 긴박함을 날것으로 전달할 때 영화는 가장 강렬하다. 문제는 이명세 감독이 '유머'로 설계한 장면들에서 발생한다. 뉴스토마토 기자가 케이블타이에 묶이는 장면의 연출은 실제 신체적 위협을 받은 사람의 공포를 복원하는 것인지, 블랙 코미디의 요소로 소비하는 것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주가조작, 명품 수수, 정치자금법 위반 등 실체적 혐의들이 산적한 인물을 미러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비판인지 희화화인지, 풍자인지 조롱인지, 이 영화의 유머는 종종 그 방향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의 '란(亂)'이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착안했다는 사실, "그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이 영화가 오래오래 남길" 바란다는 감독의 발언과 이 장면들 사이의 긴장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남는다.
<환타지아>는 클래식 음악을 이미지로 변환해 음악당에 오지 않을 관객에게 베토벤과 바흐를 가져다줬다. <란 12.3>의 야망도 그것과 닮아 있다. 계엄의 밤을 이미 수십 번 뉴스로 접한 관객에게 그날의 감각을 새로 체험시키겠다는 것. 칠순을 앞둔 이명세 감독에게서 나온 이토록 파격적인 다큐멘터리 형식 자체는 분명 새롭고, 그 감각적 성취는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환타지아>가 음악에 대한 경외 위에서 작동했다면, <란 12.3>의 유머는 때로 그 경외의 반대편을 향한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데는 의외로 인색했다. ★★★
2026/04/24 메가박스 동대문
※ 영화 리뷰
- 제목 : <란 12.3> (Ran 12.3, 2026)
- 개봉일 : 2026. 04. 22.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96분
- 장르 : 다큐멘터리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이명세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