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앱을 검색해보니 진짜 @@맨션이 남아있었다. 40여년 전 나는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엄마, 우리가 그때 살았던 그 집에 한번 가볼래? 치매로 조금씩 기억을 잃고 있는 엄마와 갑자기 고향을 찾았다.
동네는 썰렁했다. 일신방직 마저 떠나고 행인보다 고양이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골목을 지나 @@맨션은 비교적 깨끗하게 남아있었다. 뽁뽁이로 추위를 막은 경비실과 낡은 현관을 지나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긴 복도를 지나 어머니는 우리가 살던 2동 202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조각난 기억들을 잘 붙여서 그날들을 이야기했는데, 점심을 먹을 때쯤 어머니는 우리가 고향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내가 대학생 무렵 부모님이 살았던 @@아파트도 그대로였다. 주변엔 지하철이 개통됐고 옆 마을엔 무슨 유명한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섰다. 어머니는 내가 방학 때 내려와 고구마 장사를 했던 상가 사거리도 기억했다. 고구마장사를 할 때 입었던 두째형의 카투사잠바를 나는 아직도 갖고 있다. 어머니는 집에서 염주동 성당으로 가는 길은 찾지 못했다. 어머니는 로사리오 모임을 이끌며 그 성당을 매일 나갔었다. 어머니와 과거로 가는 여행은 곳곳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예전의 자신으로 남아있기 위해 발버둥친다. 남아있는 어머니의 기억을 복사해 어디 외장하드에 넣어둘 수 있을까.
염주동성당 지하주차장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고구마는 영하 8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지면 얼어서 구워도 잘 익지 않는다. 고구마 리어커를 그래서 밤마다 성당 지하주차장까지 밀고 가야했다. 그 무렵 내 본업은 주일학교 교사였다. 아이들의 은총시장 때 우리는 지하 주차장에 ‘성모님께 가는 길’을 꾸몄다. 인삼밭에 쓰는 검은 차양막 등으로 어두운 길을 만들고, 황병기교수의 가야금곡 ‘미궁’을 틀었다. 아이들이 비명과 두려움 속에 터널을 통과하면 촛불로 꾸며진 성모동산을 만날 수 있었다. 행사는 아이들이 운동화를 무더기로 잃어버릴 만큼 대성공이였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는 조선대 앞 큰길가의 건물을 세내서 직접 독서실을 운영했다. 다시 찾아간 그 독서실 건물은 내가 큰 만큼 쪼그라져 있었다. 우리는 지하에 도너츠 공장이 있었고, 그래서 쥐가 많았다는 기억을 이야기했다. 대학가인데도 구도심 상권은 막차가 떠난 터미널처럼 썰렁했다. 작은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이제 따스한 것은 햇살만 남은 동네. 골목 구석에는 친구가 살던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집이 여태 남아있었다. 집 앞에 토끼장이 있었는데, 프로야구 선수로 제법 유명세를 탄 그 친구가 왜 일찍 은퇴했는지 모르겠다.
어둑어둑해지고 우리는 대전으로 올라와 새알 단팥죽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머니는 내가 일찍 안죽어서 자식들을 힘들게 한다는 클리셰를 시연했고, 나는 '어머니의 기억이 모두 죽어 나를 못 알아보는 날이 온다고 해도, 당신이 자식들과 함께 한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중요하니 절대 잊지마라고 말씀드렸다.
식사를 마치고 남을 죽을 포장하는데 어머니는 포장용기 돈을 조금 더 드리라고 했다. 사장님께 찹쌀 새알이 너무 부드러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남은 죽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는데 어머니는 누가 가져온 죽인지 궁금해했다. 나는 우리가 어제 고향에 다녀왔으며, 저녁에 유성의 죽 집에 들렀었다고 다시 말해줬다. 나는 또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하느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을 주말을 보냈지만, 어머니는 이 경험을 오래 기억하진 못할 것 같다. 며칠 있다가 물어봐야겠다. 우리가 주말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우리가 기억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머니가 잊어버렸다면 또 말해줘야겠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남은 기억들과의 이별에 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