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성이라고 덮어놓고 무시하는 건 당연히 싫다. 여자라 운전을 못할 것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보는 것도 싫다. 왜냐면 나는 12년 무사고 운전자이기 때문에.
지난 주말. 평소에 잘 가지 않는 동네에 갔다가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주택가 양옆으로 쭉 주차가 되어있는 길에서 천천히 직진 후, 우회전해서 큰길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자마자 골목으로 진입하는 SUV와 마주쳤다. 둘 다 그 자리에 우뚝 멈췄고, 남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후진을 해야 했다. SUV 뒤 쪽에는 다른 차가 없었고, 내 뒤에선 또 다른 차가 코너에 주차 중이어서 나는 후진을 할 수가 없었다. '상황을 보고 SUV가 조금 빼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후진은커녕 전진을 해서 내 차 앞코에 바싹 붙이는 것이 아닌가! 니가 빼라는 신호였다.
잠시 아무 행동도 않고 그 자리에서 고민에 빠졌다. 상대방 운전자가 답답했는지 창문을 내리고 차를 빼라는 손짓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 손짓이 너무 싫다.) 나도 앞창문을 내리고 대차게 외쳤다!!
"저 후진 못할 것 같아요, 뒤에 차가 주차 중이에요. 사장님이 조금만 빼주시면 안 될까요~?"
비굴하고 연약한 척을 한껏 머금은 목소리로.
그리고 좌우사이드미러, 룸미러를 번갈아 보며 일부러 허둥지둥 댔다.
SUV에 탄 중년 남성 운전자는 나를 보고 한숨을 쉬더니 차를 뒤로 뺐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나는 그가 터 준 좁은 틈으로 빠져나가며
"감사합니다." 라며 아까보다 더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운전 중 여성 운전자와 맞닥뜨렸는데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남성 운전자들은 배려를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일부러 상황을 나한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상대방을 우위에 올려두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복잡한 쇼핑센터 지하 주차장이었다. 주차요원은 운전자를 확인한 후 여성이면 무조건 그 차를 예의주시하며 주차가 완료될 때까지 수신호를 보내고 핸들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제 후진해라 하며 주차를 도와(?)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기가 생긴 나는 더욱더! 한 큐에 주차하는 여성 운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모든 주차스킬을 끌어올려 각도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일부러 한 손으로 후진 핸들링을 하는데도 그 주차요원은 계속 내 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차하면 달려와서 도와줄 기세였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대체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남성들에게 '여성도 운전 잘할 수 있다고요'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여성은 잘 못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은 건지.
기회주의자 같은 나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마 그 주차요원도 나 같은 사람을 만난 뒤 여성 운전자들만 주차를 도와주게 된 건 아니었을까.
살면서 자주, 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만나게 된다. 아들에게 종종 '그런' 사람은 없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라는 말을 해주는데, 그렇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뒷좌석 카시트에 탄 아들이 비굴한 엄마목소리를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문득 부끄러워진다.
** 글쓰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초보입니다. 어떤 피드백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이킷과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