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Pick #94
1. '좀비 기업'이라고 하면 보통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성장도 멈추고, 투자도 못 받고, 그렇다고 망하지도 않은 채 연명하는 회사들이죠. 그런데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런 '벤처 좀비'들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인수하는 투자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탈리아 기업 벤딩 스푼스(Bending Spoons)가 대표적인데요. 에버노트, 밋업, 비메오처럼 한때 잘나갔던 브랜드들을 헐값에 사들여 회생시키며 성장해왔습니다. 지난달에는 단 48시간 만에 AOL 인수와 2억 7천만 달러 투자 유치를 동시에 발표하며, 기업 가치를 2024년 초 25억 달러에서 110억 달러로 네 배 이상 끌어올렸죠.
2. 벤딩 스푼스의 전략은 단순합니다. '사고, 고치고, 영원히 보유한다(Buy, Fix, Hold Forever)'. 벤처캐피털이 유니콘을 키워 대박 엑싯을 노리는 것과 정반대죠. 비슷한 전략을 쓰는 커리어스(Curious)의 창업자 앤드류 듀몽은 "VC 파워 법칙에 따르면 80%의 기업이 실패하지만, 유니콘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사업체는 수두룩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좀비 기업들은 건실한 SaaS 스타트업이 연 매출의 4배에 거래되는 것과 달리, 때로는 연 매출의 1배 수준에 팔리기도 합니다. 저렴하게 사서 비용을 줄이고 가격을 올리면 거의 즉시 20~30%의 이익률을 낼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3. 물론 논란도 있습니다. 벤딩 스푼스가 에버노트를 인수한 후 전 직원을 해고하고 유럽으로 본사를 옮겼고, 밋업과 위트랜스퍼에서도 비슷한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어졌거든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에버노트는 인수 전보다 더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이 전략의 핵심은 VC처럼 성장만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수익성에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영업, 마케팅, 재무 같은 기능을 여러 인수 기업에 걸쳐 중앙 집중화하면 개별 기업이 홀로 버틸 때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니까요.
4. 이 모델은 AI가 발전하면서 더 주목받고 있어요. AI 네이티브 스타트업들이 쏟아지면서 기존 VC의 투자나 지원을 받았던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거든요. AI 덕분에 창업 비용은 줄고 수익화는 빨라지면서, 여러 번 투자받을 필요 없이 '한 방에 끝내는' 스타트업이 늘어날 거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역설적으로, 기존 방식으로 투자받았다가 성장이 멈춘 기업들, 즉 인수 대상이 될 '벤처 좀비'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죠.
5. 이러한 흐름은 실패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유니콘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가치 없는 건 아니니까요. 연 100만~500만 달러의 반복 매출을 내는 기업들, 사모펀드도 큰 관심 없고 VC도 심드렁한 '어중간한' 회사들이 누군가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습니다. 듀몽의 말처럼 "정체된 기업에서 수익을 내는 건 엄청난 작업"이지만, 그래서 경쟁자도 적습니다. 한국에서도 이전에 붐을 탔던 IT 서비스들 중 아직 조용히 살아있는 브랜드들이 있을 텐데요. 어쩌면 그들에게도 제2의 전성기가 올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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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나사로의 부활(The Raising of Lazarus), 1630-1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