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이 인간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
오랜만에 가족끼리 자연 휴양림으로 일박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휴양림은 갔다는 표현보다는 왠지 들어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월요일 이른 오후 아빠가 나를 픽업하러 오셨다. 이미 나는 아침 겸 점심으로 근처 한식뷔페에서(일명 구내식당) 한 끼 뚝딱한 터라 배를 두들기며 조수석에 앉았다. 딸 밥 먹었어?라는 물음에 어 아점으로 대충 먹었어라고 대답하니 아빠는 살짝 배신감을 느낀듯했다. 1시쯤 만나는데 아빠랑 점심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못한 거야 딸? 음.. 어 이따 또 먹지 뭐 나는 또 먹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평소 연락도 잘 안 하는 큰딸이 반가우신 기색이다. 아빠를 흘긋 보니 내가 나이 들어가는 만큼 아빠의 세월도 느껴지는 게 싫어서 창문 밖을 건너다보며 연신 과자나 우적댔다. 서울을 빙글빙글 돌아 양평 초입에 당도했다. 잠깐 내려 요기를 하기로 했다. 별로 배는 안 고팠지만 바로 보이는 메밀 무슨 집으로 아빠를 모셨다. 들기름 막국수랑 감자만두를 시키고 먹는 둥 마는 둥 앉아있다가 나왔다. 유난히 짧은 머리의 우아한 중년 여성들이 많은 식당이었다. 다시 차에 올라타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근처 어디에서 먹을만한 것을 좀 사가려고 했는데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휴양림 초입이다. 불안한 마음에 급하게 편의점을 검색해서 겨우 겨우 찾아갔다. 그런데 별로 뭐 살 것도 없어서 과자랑 카스텔라 따위의 간식거리만 몇 개 집어 나왔다.
구불구불한 임도를 타고 올라가 휴양림에 들어섰다. 엄마의 개 토리와 동생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곳이 일박이일 우리의 집이 되어줄 곳인가. 아빠는 바리바리 준비해 온 짐(미리 재어온 고추장불고기, 김치, 상추 그밖에 별로 내가 관심 없는 먹을거리들)을 꺼냈다. 나는 잠깐 토리의 파이팅 넘치는 환영세리머니를 받아주고 방을 돌아다니며 엄마가 삶아 놓은 옥수수를 왼손에, 달큼한 향이 확 끼치는 물복(세상에 이런 맛이) 한 조각을 오른손에 쥐고 양손 먹기 신공으로 잠시 극락에 다녀왔다. 접시에 담겨있는 투명한 연녹색으로 빛나는 샤인머스캣을 바라보며 손이 세 개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평소 과일을 잘 안 챙겨 먹으니까 누가 씻어주거나 깎아주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짐정리를 끝낸 우리는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곧 바닥에 널브러져 각자 폰을 보며 온라인 세계에 접속했다. 현실세계 오프라인에서 만나도 손에 쥔 폰을 놓아서는 안되기에. 내가 없는 사이 온라인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말이다.
각자의 온라인 세계를 탐닉하다 잠시 저녁메뉴에 대해 의논한다. 엄마가 준비해 온 오리백숙에 쌀을 넣어서 죽을 끓이고 동생이 준비해 온 수육을 먹겠다고 한다. 나는 배도 별로 안 고프고 둘 다 별로 관심이 없는 음식이라 아까 먹던 옥수수랑 샤인머스캣이나 먹으리라 생각했다. 저녁메뉴가 결정되고 모두들 다시 더욱더 편한 자세로 온라인 세계. 나는 더욱더 편한 온라인 탐험을 위해 저쪽 방으로 건너가 본다.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는 하얀 베개를 붙박이 장에서 꺼내 털썩 누웠다. 인터넷이 엄청 느린 것이 이 방에서는 왠지 LTE가 잘 안 터지는 것 같다. 월 2만 원짜리 알뜰폰이라 더 그런가? 잠시 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가 떠본다. 창밖으로 싱그러운 녹색잎이 일렁거리고 있다. 아직은 더운 늦여름. 천장 쪽에 작고 투명한 창이 하나 나있다. 언제 떨어졌는지 모를 작은 솔방울 같은 것이 보인다.
비가 오려나 하늘이 조금 흐리게 보인다. 누군가 휴양림에 왔으니 더 늦기 전에 토리를 데리고 산책을 하자고 말했고 나도 따라나섰다. 반려견운동장으로 걸어가서 토리를 풀어놓고 푸르른 잔디밭을 밟고 서서 손에 쥔 폰을 본다. 사실 딱히 재미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화면을 깨우고 소셜앱을 들어다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정말 대차게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리는 파라솔이 펼쳐져있는 탁자아래로 피신했고 토리는 저 멀리에서 정신없이 잔디에 주둥이를 박고 있다가 비가 마구 쏟아지자 탁자로 뛰어들어와 세이프. 눈으로 들어가는 빗방울에 놀라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펄럭이며 뛰어오는 모습이 귀엽다. 몸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고 상당히 당황스러워하는 토리를 보며 사람들은 웃었다. 어린 시절 언젠가는 어느 처마나 어느 지붕아래서 함께 비를 피하며 서로가 거의 세계의 전부인 시간도 있었을 텐데. 자식들은 장성했지만 철 없이 나이만 먹고 부모님들도 일 년 일 년이 다르다. 큰 질환도 한 번씩 겪으시고 많이 내색은 안 하시지만 어디 어디 안 아픈 곳이 없는 것 같다. 하긴 내 찬장에도 갈수록 병원에서, 약국에서 타온 약봉투가 늘어나는 것을 보니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와르르 쏟아붓던 물줄기가 또 희한하게 잦아들었다. 공기가 고요해지고 새와 풀벌레게 조금씩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땅에서 비와 섞여 올라오는 흙냄새와 풀냄새를 폐로 들이마시며 토리와 숙소로 돌아갔다. 조금 아쉬워서 엄빠랑 나는 저쪽 위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 보기로 한다. 풀이 우거진 산책로를 걷다 보니 졸졸 물소리가 난다. 작은 폭포와 물웅덩이가 있는 곳이었는데 다들 반색하며 좋아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신발을 신고 저벅저벅 물로 걸어 들어갔다(크록스라 가능). 물이 굉장히 차고 맑다. 물이 허벅지까지 닿아 찰랑거린다. 이윽고 엄마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고 우리의 사진을 열심히 찍던 아빠도 물안으로 들어왔다. 어릴 때 이 멤버로 계곡에서 놀던 추억이 코끝을 스쳐 지나간다.
숙소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라는 큰일을 끝내고 나니 다시 강 같은 평화-온라인타임이 왔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인터넷이라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밈과 사진과 짤과 단편적인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아빠도 정치와 건강 관련 유튜브를 연달아 시청하시더니 갑자기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달력을 부욱 찢어 손수 볼펜으로 그려온 윷놀이판을 펼쳤다. 우리는 바닥에 앉아 윷놀이를 한판 벌였는데 생각보다 아빠의 승부욕이 지나쳐 가뜩이나 승부욕 없는 나는 금세 노잼모드가 되어 세 번째 판에는 다른 방에 가서 누워있었다. 문제는 데이터가 터졌다 안 터졌다 하는 것. 약하디 약한 신호를 붙잡고 있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가족들은 이제 윷놀이를 마치고 마지막 폰타임을 마친 뒤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위로 난 투명한 창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점차 거세지는 빗방울, 핸드폰을 보니 완전히 서비스 가능지역이 아니라고 뜬다. 나는 불안해졌다. 내가 온라인에 접속하지 못할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여기서 무슨 일이란 세계평화나 국제정세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잠시 놓치게 될 고양이나 개동영상, 거위가 집을 지키거나 오리가족이 무사히 차도를 건너는 영상 같은 것을 못 보는 것, 갑자기 생각나는 똥글을 아무 sns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절부절못하며 폰을 들었나 놨다 하는데 번개가 번쩍번쩍하다 이윽고 쿵하고 천둥이 떨어진다. 나는 원래 천둥번개를 좋아하고 지금 이 기쁨을 온라인에 있는 누군가와 나눠야 하는데 내 핸드폰은 서비스가능지역이 아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황토로 마감한 벽과 나무로 만든 샹들리에, 나무로 된 천장 따위를 눈으로 천천히 훑으며 강제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했다. 벽지를 한참 노려봐도 잠이 안 왔다. 살짝 코를 골며 자는 엄마 옆에서 이제 서비스 지역으로 들어왔을까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폰을 깨웠지만 여전히 오프라인이다. 너무 심심한 나머지 메모장에 아무 말이나 메모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잠귀가 예민한 엄마가 잠이 안 오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잠이 온다고 한소리 하셨다. 별 수 없이 폰을 뒤집어 두고 검은빛만 보이는 작은 창을 노려봤다. 그날 메모한 것은 다음과 같다.
'덥고 잠이 안 오고, 빗소리는 크고, 폰은 안 터지고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필요한 밤이다. 산속의 밤은 깊어가고 연결상태를 확인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네트워크 연결을 확인...'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기억이 한 3시 반쯤, 스르르 잠이 들었는지 아침이 왔다. 아침을 먹고 빈둥대다 짐을 꾸리고 뒷정리를 하고 11시쯤 체크 아웃을 하는 시간까지 내 폰은 오프라인이었으며 구불구불한 임도를 내려가 양평 시내의 편의점이 보일 때쯤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다. 폰을 열어보니 새로운 메시지 0, 새로운 톡- 광고 2개, 바쁘게 엄지를 놀려 소셜앱 이것저것 체크, 모든 것이 제자리인 것을 확인하고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두 세계에서 균형 잡기란 어려운 법이다.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