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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냥하뮤

산책

by 하뮤하뮤

아무런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오늘 글쓰기는 틀렸다. 산책이나 갈까? 답답하거나 불만족스럽거나 기분이 좋거나 심심하거나 할 때 아무튼간에 산책은 언제나 좋은 선택이다. 하천에 날벌레가 너무 많아서 태극권 수련을 하듯 오른쪽으로 반바퀴 왼쪽으로 반바퀴 휘휘 팔을 휘돌리면서 걸어야 했던 봄, 1분만 걸어도 땀으로 머리카락이 들러붙던 여름, 쾌적하게 산책을 할 수 있는 가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마법 같은 시기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


다만 이번 가을은 단풍을 보기도 전에 겨울이 와버렸다. 반팔을 입고 외출했다가 맹렬한 이른 추위를 맛보고 부랴부랴 겨울옷을 꺼내던 날, 먼지 냄새나는 옷 더미 위에 황망하게 앉아서 몇 달 남지 않은 이번 연도를 손가락으로 헤아려보았다. 산책도 많이 못한 것 같은데 손가락 두 개만 남았구나. 나는 산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산책에 관련된 곡을 두곡 썼다. 그래도 10월 중 어쩌다 보니 등산을 하게 됐는데 그것을 산책에 넣기로 했다.


베이스를 치시는 분이 산악회 음악회 행사를 산어귀에서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해주신 것이 발단. 산어귀가 대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있는 한 페이가 있는 행사는 마다하지 않는 법. 산이라는 것도 내심 궁금했다. 사실 나는 예전에 백두대간 종주를 반정도 한 어엿한 산사람(?)이다. 과거엔 산 허리에 걸린 구름만 봐도 가슴이 막 웅장해져 오던 그런 사람. 하지만 등산을 안 한 지 굉장히 오래되었고 무거운 기타를 메고 가야 하는 게 문제. 그리고 요새 근력운동을 안 해서 해바라기씨껍질처럼 훅 불면 넘어질 것 같은 내 몸뚱이도 걱정됐다.


하필 비와 바람이 불던 날, 하필 저녁타임에도 공연이 하나 더 있어 마음이 분주하던 날, 아침부터 지하철 한 시간 반정도를 타고 집결장소에 가니 웅장한 산 아래 구름이 휘감고 비가 촉촉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은 뭔가 느낌이 비슷하구나. 네팔과 칠레 어디 뫼 산 마을을 떠올리며 과거 산악인으로서의 설렘을 감추고 짐짓 걱정되는 표정으로 산을 올랐다. 다행히 등산화(신발장에서 곰팡이 피어가던)는 잘 신고 왔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오히려 나무와 풀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가다 보니 꽤나 웅장해 보이는 폭포도 졸졸 내려오고 계곡에서도 풍부한 물줄기를 뽐내며 물이 흐르고 있었다.


과거 산악인으로서 감을 잃어버린 탓인지 등산화만 제대로 신고 오고 물 한병, 간식 한 봉지조차 가지고 오지 않은 나는 빈속에 마른침만 삼키며 걷다가, 건반 치는 선생님이 홈런볼을 건네주셔서 행복한 표정으로 홈런볼을 다람쥐처럼 볼에 욱여넣었다. 허기짐이 사라지자 이제 목이 급격하게 말라오는데 계곡물이라도 마실까 잠시 고민하다가 도시인답게 참고 또 한참을 올라갔다. 우리는 잠시 매우 자연친화적인 화장실에 들렀고 완벽한 도시인이 돼버린 과거산악인인 나는 이 화장실이 정말 짜릿했다. 걸핏하면 화장실 바닥에 폰을 떨어트리는 나이기에.


등산로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행사장이라더니 거짓말이었다. 정상에 가까운 산장이 그날의 행사장이었고 내리는 비에 우산을 받쳐 쓰며 오랜만에 내가 사랑했던 산들을 떠올리며 기계처럼 다리를 움직였다. 옷이 땀과 비에 젖었고 배가 무척 고프고 목이 말랐다. 어쨌든 산장에 도착하니 산장지기처럼 보이는 분이 화목난로에 불을 떼주셨고 끓여놓은 물을 천천히 따라 마시면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또 누군가 가지고 온 삶은 계란을 하나 얻어먹고 또 산악회 회원님이 지고 온 직접 싼 김밥을 한통씩 얻어먹었는데 정말 감사했다. 김밥을 집에서 말아서 통에 소분해서 그것을 다 짊어지고 오신 여성분은 산악구조대라고 했다. 나는 그 김밥맛과 강인함과 친절함에 (하여간 많은 칭찬) 감탄하며 김밥을 꼭꼭 씹어먹었다. 산을 타서 그런가 맑은 기운이 얼굴에 서려있는 산악회 회원님들을 관찰하며 같이 올라간 연주자님들 사이에서 연주를 했다.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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