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사람이 있어요
이번 1년 중 가장 유유자적했던 11월, 4번 정도 소소하게 잡혀있던 클럽, 펍 등에서의 공연일정을 월초에 끝내고 실내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는 시간을 보냈다.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시간들. 바깥활동이란 가끔 동네 천변을 산책하는 것과 최소한의 노동을 하러가는 것이 전부다. 오리들은 뾰족하고 둥근 엉덩이를 치켜들며 물속에 뭔가를 훑어먹고 있고 물가에 키 크게 자라난 하얀 갈대들도 바람에 날린다. 나뭇잎은 많이 떨어졌지만 아직은 완전히 겨울로 가지 않은 낮에 빨갛고 노랗게 물든 작은 별 같은 단풍이 길에 가득 깔려있는 것을 보며 다리가 저릴 정도로 앉아있어 보는 거다. 보온병에 담아 온 뜨거운 차를 마시면 더 좋을 것 같긴 한데.
가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조그만 냇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안에 있는 게 뭔가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귀로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머리로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말이 흘러가게 두면서.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그 사람의 냇가를 들여다보는 생각을 해본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또 미래의 소망이 담겨있는 단어와 문장들이 이른 캐럴이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뒤섞여 놓여있는 것을 본다. 어느 정도는 기분이 흐뭇해진다. 자연스럽게 가만히 놔두면 마치 평행우주같이 만날 일 없는 서로의 생태계가, 냇물이, 여울이 어떤 것을 계기로 만나게 되는 걸까? 망망대해를 표류하다가 뭍에 닿은 유리병 같은 걸 열게 되면 열리는 걸까?
최근 발매했던 몇 곡을 모아서 방송심의를 받아둔 참에 어디 소개해줄 만한 곳이 없나 생각하다 라디오가 떠올랐다. FM방송국 홈페이지를 둘러보다가 TBSeFM의 1012*1013라는 프로그램 중 Indie Before Noon이라는 코너가 눈에 띄었던 것(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은 폐지된 프로그램인데 홈페이지 관리자가 없어서 남아있는 것)이다. 곡을 소개하는 메일을 작성해서 프로그램 메일주소로 보냈다. 혼자 모든 것을 하는 인디 뮤지션에게는 별로 프로모션 할 방법이 없다(돈을 좀 태워서 인스타나 유튜브 광고를 돌리는 방법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돈이 좀 생기면 시도해 봐야겠다). 나는 일단 뭔가를 발견하면(이를테면 처음 가보는 클럽에 긱을 잡는 일 같은) 별다른 고민 없이 스팸처럼 보일 각오로 보내고 본다. '읽씹', '안읽씹'이 디폴트라 전혀 상처받지 않는다. 그런데 의외로 며칠 후 답장이 왔다. 나는 망망대해에서 건져 올린 유리병을 주운 사람처럼 조심스레 유리병뚜껑을 열었고 그곳에는 곡소개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어떤 경로로 이 코너를 알게 되었냐고 묻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나는 서울의 밤섬 같은 무인도에서 표류하고 있는 김 아무개(영화 김 씨 표류기: 2009)인데 와인병에 담긴 쪽지를 발견한 기분으로 내가 메일을 쓰게 된 경로를 설명했다(비록 TBS를 TBN이라고 잘못 말하긴 했지만). 반응이 왔다는 것만으로 신나서 몇 곡을 더 추천드렸다. 밤섬에 표류되어 있는 수요 없는 공급자 고닭은 기분이 좋아졌다. 김 씨처럼 야생밀로 꿈에 그리던 짜장면을 해 먹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쪽지를 담은 유리병은 몇 차례 강과 바다를 두둥실 떠다녔고 곡은 며칠 후 방송에 송출됐다.
처음 곡소개 메일을 쓸 때는 몰랐던 사실인데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현재 TBS eFM은 제작 상황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인터넷 어딘가에서 읽었고, 메일을 주고받은 피디님은 1인으로 기획, 작가, 진행이라는 역할을 해내는 중이었다. 코너에서 곡을 정성스럽게 소개해주시고(그것도 두곡이나!) 앞으로 더 많은 인디뮤지션들의 음악을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기대없이 보낸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라고 신호에 어딘가 멀리에서 아니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라는 신호를 받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생태계를 가꾸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거나 야생밀을 기르고 있다. 표류하다 보면 가끔씩 만나게 되는 서로의 우주를 응원하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듣보잡 방구석 뮤지션인 고닭은 오늘도 수요없는 공급을 위해 열심히 음악을 만들어보기로 한다.
혹시나 궁금한 사람을 위해 다시 듣기 링크를 걸어둔다(약 1:04:00부터 고닭곡을 소개해주시고 1:15:00 부터 종료시 까지 스트리밍 상태의 악화로 인한 끊김이 있긴하다...)
https://www.youtube.com/live/aJz0LHUCpwI?si=E97muDyjXsygHVJJ&t=3863
구독도 하고 응원도 팍팍해드리자.
덧붙여 자신의 곡을 홍보하고 싶은 인디뮤지션님들아,
TBS eFM <1012x1013@gmail.com>로 메일을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