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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이아빠 Apr 18. 2024

육사 5년차 전역한 아버지의 사회 적응기

군인으로서의 삶을 정리하며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과 설레임."


2010년 처음으로 직업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고, 2015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지금까지 군인의 길을 걸어왔던 내가, 오랜 고민 끝에 5년차 전역을 하게 되었다. 처음 군문에 들어섰을 때와는 다르게, 곁에는 아내와 2명의 자식이 생겼기에, 이 결정은 나 하나만의 운명이 아니라 4명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를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성공적으로 시작하기 한 의식의 일환이다.


처음 기초군사훈련을 받을 때가 생각난다. 다른 이들은 모두 힘들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군인과 적성이 잘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초군사훈련이 끝나고 1학년, 2학년,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다. 불합리하고 이해되지 않는 여러 통제를 받을 때마다 불만은 많이 생겼지만,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통제였기에 군인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예상 범위 이내의 통제였기에 생도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4학년이 된 후에는 똑같은 생활을 3번씩이나 했기에 생도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오히려 졸업이 다가올수록 장교가 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품었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까지는 해왔던 일의 반복이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육사 출신 장교로서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다. 물론 그런 사념들은 임관 후 정신없이 시키는 것을 하다보니 순식간에 사라졌기에, 5년차 전역 후 백수가 된 지금, 내가 품은 두려움과 걱정도 치열하게 취업 준비를 하다보면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처음 야전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경기도 연천에서 포병 장교로서 군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숙소는 영내숙소를 배정받았다. 당시 부모님께서 짐을 숙소까지 차로 갖다주셨는데, 숙소를 처음 봤을 때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아버지는 요즘 장교의 대우가 이것밖에 안되냐고 살짝 화를 내셨다. 나 역시 처음 숙소를 봤을 때는 기분이 묘했지만, 비바람만 피할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그렇게 큰 타격은 받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가끔 겨울에 보일러가 작동이 되지 않아 막사에서 샤워를 할 때는 조금 서글펐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이 다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 생각하며 감내하였다.

처음 가족과 동거를 시작하게 된 날이 생각난다. 20년 6월 동두천에 새로 지은 관사 거실에서 창 밖을 바라보면, 넓은 창 너머로 횡으로 흐르는 강과, 강 너머로는 건물과 산들이 보였다. 탁 뜨인 시야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5살의 나이에 예쁜 아내와 깨끗하고 넓은 집에 서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그러한 감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군 복무에 대한 모든 회의와 고민은 일본어반이 끝나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10개월의 일본어 교육 수료 후, 바로 대위 지휘참모과정 교육을 받으러 갈 줄 알았는데, 야전에 갔다가 교육기관으로 가야한다는 위관 보직장교의 연락을 받았다. 게다가 강원도로 가야한다기에, 육군 규정상 직무 보수교육의 경우 교육기관에서 교육기관으로 가는 것이 가능한데 왜 야전에 가야하냐고 따졌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육군 규정은 그렇지만 포병 지침은 그렇지 않다며, 야전으로 가라는 말뿐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때 아랍어반에 있었던 한 포병장교는 국방어학원이 끝나고 바로 포병학교를 갔다고 한다.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강원도를 가면서 진지하게 전역을 생각하게 되었다.

강원도에 가게 되면서 바로 숙소가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게 되었는데, 당시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기에 사정상 우리 부모님 집에서 지내면서 어머니와 공동 육아를 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육아를 도와주니 몸은 편해도 마음은 정말 불편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티 하나도 내지 않은 아내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 뿐이다. 그렇게 약 두 달 동안 파견간 후배장교 방에서 숨어 지내다가 관사를 배정받았다. 이때 왜 사람들이 강원도를 안 가려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기혼자 숙소 뿐만 아니라 독신자들도 2인실에 3명씩 사는 경우도 많아 서부에 비해 주거 환경이 많이 열악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관사에 사는 사람 수 자체도 적어 내가 출근하면 아내는 같이 놀 사람이 없어 많이 우울하고 힘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아내한테 미안하기만 한 군생활을 하다보니 문득 군인을 그만두는 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가족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부대가 너무 바빠 휴가를 쓰지 못해 20년 이후로 여행을 간 적이 없고, 잦은 당직 근무와 야근 때문에 혼자 임신한 몸으로 독박 육아하는 날이 많아 그녀는 항상 지쳐있었다. 가화만사성,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말들에서 알 수 있듯이, 가정의 화목함이 정말 중요한데, 군생활을 하면 할 수록 가정이 흔들리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5년차 전역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겠다고 말했더니, 왜 굳이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다른 길을 알아보냐고 싫다고 대답했다. 그랬던 아내가 5월 16일 출근하려던 내게 5년차 전역 준비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솔직히 10년 정도 버텨서 소령이 되면 지금보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버텼는데, 최근 군인가족 카페에 영관 가족이 쓴 글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글을 보니 영관장교가 되면서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는 내용이었는데, 아내는 전역할 때까지 이런 삶을 살 자신이 없다고 했고, 나 역시도 힘들어하는 아내 모습이 떠올랐기에 5년차 전역을 결심하게 되었다. 가족이 힘들어하는데, 군인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군생활을 오래한 분들의 가족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왠만한 애국심과 희생정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것 같다.


부모님과 친척, 부대 간부와 친구 등 많은 사람들이 전역을 만류하였지만, 가정 상의 이유를 제외하고도 전역을 결심한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육사 출신이 가장 빛나는 곳은 군대이라는 선배의 말씀도 맞는 이야기지만, 육사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본인 스스로의 힘만으로 사회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열망, 노동과 헌신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고 싶다는 욕구, 커리어를 쌓고 능력을 개발하여 언젠가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고 싶다는 마음 등 자아실현의 욕구가 주된 원인이었다.


5년차 전역 후 백수가 된 지 어느덧 3주차에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대략 30개가 넘는 기업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아직까지 좋은 대답을 듣진 못 했지만,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다보면 언젠가 운명의 회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에 따라 장교가 되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사회에서의 성공적인 첫 발걸음을 떼는 그 날이 올 때까지, 그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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