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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gowords May 06. 2024

두루마리 휴지- 기억의 시작

아빠는 건설현장 소장님이셨다. 어린 나이에 그게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누군가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냐" 물으면, "건설현장 소장님이십니다"라고 착실히 대답하곤 했다. 


집안에서 늦둥이인 나는 어렸을 때는 건설현장 '소장님'이신 아빠와 함바집을 하던 엄마와 함께 살았다. 대충 6살 때까지이지 싶은데, 공사 현장 한편에 딸린 작은 방 하나에서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노란 장판과 불 꺼진 함바집, 높게 쌓인 흙더미와 못이 박힌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각목들, 이런 것들이다. 아, 하얀 두루마리 휴지도.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잘하고 똑똑했다고 한다. 집안 어른들은 변호사를 시켜야 한다고 했고, 아빠는 내가 무주구천동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서 머리가 좋은 거라고 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것들을 주섬주섬 생각하다 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니, 바로 하얀 두루마리 휴지이다.


한 4-5살쯤이었으려나? (사실 너무 어렸을 때라 정확히 몇 살인지 모르겠다)


어린 나는 노란 장판이 깔린 작은 방 한편에 아빠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두루마리 휴지 걸이와 휴지가 놓여 있었는데, 아빠는 내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하고야, 너 이거 한번 끼워봐"

"?" (뭔 소린가 싶어 아빠를 쳐다봤던 것 같다)

"이 휴지를 휴지걸이에 걸어보라고"

"..."  


나는 아무런 말 없이 휴지걸이와 두루마리 휴지를 이어 보기 위해 서로 붙였다 떼었다, 끼웠다 뺐다 하면서 만지작거렸다. 그러길 한참, 아빠는 곧 "이건 못하네" 하면서 내게서 그것들을 가져가셨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정답을 보여주었다.


"이 두루마리 휴지를 휴지걸이 가운데에 넣은 다음에 이 막대기를 휴지 구멍 사이로 끼워 넣어야지"

"..."


다음 장면은 생각나지 않는다. 당시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장면이 내가 머리로 기억하는 '생애, 첫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기억 뒤에 따라오는 부적절감과 수치심은 오랜 기간 오롯이 나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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