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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선 윤일원 May 28. 2024

무거워야 조급해지지 않아

설악산 십이선녀탕 복숭아 폭포가 풍만한 서양 글래머라면, ...

  

지난 토요일(5.25.) 오후, 거실에 잔뜩 펼쳐 놓은 짐 보따리를 보더니만 둘째가 “아빠, 어디 아랍으로 파병(派兵) 떠나세요?” 하고 첫째는 “어이쿠 이 돌덩이를 메고 어디를 가세요?”를 하더니만, 드디어 아내가 “참 대단도 하셔요” 하고 한마디 건넨다.     


그래. 너희 세 사람이 다 안아보지도 못할 아름드리나무도 털 같은 여린 싹에서 시작하고, 천 리 길도 발아래 한 발에서 시작함을 어찌 알겠노? 그 시작이 바로 ‘짐’이라는 것을, 짐이 없다면 부담도 없지만 한 걸음도 시작하지 못한다는 것을. 무거워야 조급해지지 않음을 너희들도 언젠가는 지리산에 들어 하룻밤을 자보면 알 것이로다.     



새벽은 어김없이 온다. 03:30. 문명의 세계는 기계다. 정확하게 23:59분에 출발한 프리미엄 심야버스는 총알처럼 정확하게 지리산 백무동에 우리를 떨구어 놓았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새벽, 천만의 말씀이다.    

  

지리산은 그런 산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하지 못한 자의 이야기일 뿐, 계곡 물소리는 바위틈을 뚫고 우당탕 지나가고,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끄르륵 꺅하면서 지저귀는 새 소리하며, 오히려 쥐 죽은 듯 고요한 새벽은 내가 지나온 문명의 소리다.     


오랜만에 랜턴을 켜니 머리에 뿔 달린 짐승이 아니라 머리에 불이 훤히 뿜어져 나오는 인간이 쇠 지팡이로 ‘따각따각’ 콘크리트 바닥을 찍고 거들먹거리면서 “나 여기 있소” 하지만, 그건 겁먹은 자의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달빛이 나뭇가지에 걸려 푸르스름한 빛을 띠면서 쏟아진다.     


첫 나들이 폭포에 도착하니 05:23을 가리킨다. 저 멀리 산 능선으로부터 내려앉은 여명이 계곡 안까지 스며들어 랜턴 없이 걷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산사랑님이 샌드위치를 꺼내 놓는다. 간사한 인간에게 두 눈이 밝아지고 두 귀가 어두워지자, 금세 상상력도 사라진다. 상상력이 사라진 세상은 정확하고 매섭고 여지가 없다. 이제 우리가 그 세상에서 벗어 난 것이다.   

   

바로, 이 시각. 늑대와 개를 구별하는 시간이다. 개를 늑대로 알아 쫓아내면 친구가 사라지고, 늑대를 개로 알아 받아들이면 내가 죽는다. 바로 그 경계점을 지나니 가내소폭포가 곧바로 나온다.   


   


신라 시대에 한 스님이 이 폭포에서 도들 닦고 있었다. 이제 도를 어느 정도 텄다고 생각하고 폭포 위에 밧줄을 걸고 두 눈을 꼭 감은 체 반쯤 건널 무렵, 그 새 정이 들었는지 지리산 마고 할매 셋째 딸이 스님의 떠남을 질투하여 가믈가믈한 몸으로 유혹하니 그만 폭포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스님은 한 마디 미련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는 그만 가네” 하여 ‘가네소’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분명 그 스님도 여인의 유혹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두 눈을 질끈 감고 건넜다고 하였는데,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로 무엇을 보았길래,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는가?     


한신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층폭포에 도착한다. 설악산 십이선녀탕 복숭아 폭포가 풍만한 서양 글래머라면, 한신계곡의 복숭아 폭포는 동양의 암팡진 탄력 100인 폭포다.    


 

내 예언하지 않았던가? 지리산은 성리학의 산이 아니라 노자의 산이라고. 오직 여기서만 谷神(곡신)이 죽지 않음을 본다고, 그것이 바로 玄牝之門(현빈지문) 암컷의 가믈한 문이라고, 그것은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고, 보지 않고 상상만으로도 떨어진 가내소폭포의 스님처럼, 두 눈을 질끈 감아도 떨어지고, 두 눈을 부릅떠도 떨어지니, 내 어찌 그 경지를 알리오?     


드디어 한신계곡의 최고 평점 세석평전 1.2킬로 남겨두고 가파른 오르막길에 접근한다. 경사도가 30도라 하지만, 체감 경사는 바로 코앞에 등산로 있다. 그 길을 오르는 자를 보면 스쳐 지나가는 산꾼인지 하루를 묵는 산꾼인지, 단번에 안다. 배낭의 무게다. 낑낑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자는 머무는 산꾼이고 날렵하게 휙 오르는 자는 머무는 자가 아니다. 무거워야 조급해지지 않는 법, 부디 조심해서 즐거운 산행이 되기를 빌어본다.     


세석평전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레깅스 차림의 젊은 남녀가 쉴 새 없이 지나간다. 우리도 저들처럼 빠르게 휙 지나가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다. 화대(화엄사-대원사) 종주 트레일런닝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좋다. 좋아, 그래 쓰러질지라도, 내 한 달간 병원 침상에 드러누울지라도 저렇게 달렸으면 좋겠다.    

  


세석평전 위로 구름이 휙휙 지나간다. 바로 코앞에 있는 촛대봉이 보이질 않는다. 오호라 드디어 과학기술의 총아 일기예보가 맞는가 보다. 비가 오기로 하지 않았는가? “저건 비가 아녀” 앞서가던 오공님이 한 소리 한다. “저건 비가 아니라 가문비나무에 구름이 걸려 떨 구는 것이여” 맞구나 맞아. 그럼 그렇지, 어찌하여 대피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가 온단 말인가?     


시끌벅적한 장터목대피소 식당 안,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우리는 버너 3개를 꺼내 놓고, 소고기 등심 2.2kg를 굽고 있다. 그 사이에 경감님이 노루궁뎅이 버섯과 야생 곰취를 꺼내 놓으니, 정쌤이 그 추운 칼바람 천왕봉에서 입을 옷도 내팽개치고 바리바리 싸 온 양파, 마늘, 된장, 청양고추, 김치를 꺼내 놓는다.     

이 무슨 해발 1,670m 코스프레인가?     


발단은 이렇다. 국방부 동우회 국립묘지 참배와 봉사활동에서 만난 산사랑님이, “윤박, 장터목에 비가 온다고 하는 데 그냥 잠만 잘 거요?” “옳거니” 내 이 ‘입’의 즐거움을 위해 ‘육신’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을 터, 까짓것 내 응당 여태 미뤄왔던 복수를 이것으로 끝낸다.     

 


그 복수란 언제나 시끌벅적한 산꾼들 사이에서 유독 솥뚜껑을 짊어지고 삼겹살 굽는 꾼들, 오늘 드디어 내 칼을 간다. “경감님, 회는 됐습니더, 고마 수박 메고 오이소” 산행의 지존은 짐이다.      

물 한 통이면 족한 것을, 아니 지리산은 물이 풍족하여 물통도 필요 없는데, 노란 수박을 떡 갈라 꺼내 놓고, 그 옆에 보라색 잘 익은 체리를 놓는다.      


그러면서 맞은편 산객에게 잘 익은 수박을 건넸는데, 수직으로 내려야 할 비가 수평으로 가른다. 이건 분명 “구름이야, 어떻게 비가 수평으로 내려” 오호라, 그렇구나, 내 어찌 이날 대피소 안 장관을 잊을 수 있을쏜가?     

*내일은 제2부, 안 오른 자는 있어도 한 번만 오른 자는 없어"로 이어지며, 사진은 한신계곡-장터목까지 풍경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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