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선 윤일원 May 29. 2024

안 오른 자는 있어도 한 번만 오른 자는 없어

하늘의 법은 도이며, 도의 법은 자연이라

비는 수직으로 내려야 한다는 중력의 법칙을 어기고 장터목의 밤은 깊어만 갔다. 벌써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그럴 만도 하다. 저마다 사연을 안고 지리산에 들어왔으니, 이제 곤히 잠든 사이 그 사연들이 쉴 새 없이 코에서 흘러나온다.


“숨이 끊어지는 소리, 싸우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나긋나긋 부탁하는 소리, 콧김 잔뜩 들어간 애교 소리, 울분 가득 찬 소리, 살살 애원하는 소리, 끙끙대는 소리, 앓는 소리, 조곤조곤 보고하는 소리, 우렁찬 구호 소리, 무언가 한탄하는 소리, 씩씩대는 소리, 꽥 내뱉는 소리”


나는 어떤 소리를 내면서 잠들었을까? 지리산에 들어왔으니 지리산의 지존 삼신 마고 할매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일 천왕봉 일출이다. 새벽 03:30 출발하니, 모든 짐을 챙겨서 자라. 아침은 하산하면서 먹는다.”


산행 안내문이다. 새벽 03:00 밖을 나가보니 다행히 비는 없지만, 구름이 앞을 가려 시야는 없다. GO, NO를 결정해야 할 시각.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출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05:00 기상, 06:00 출발”로 변경하여 공지한다.


경제학에서 '제약적 최적화(constrained optim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부족한 자원에서 최적의 조합을 선택하라는 거창한 말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대표적 자원이 시간과 돈이다. 주어진 시간과 돈 안에서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게 한 평생 살다 보면, 어느새 내 주인은 ‘내’가 아니라 ‘시간’과 ‘돈’이 된다.



지리산 가실래요? “아니 시간이 없어서요.” 몽골 별밤 가실래요? “아니 돈이 없어서요.” 그렇게 시간과 돈의 제약으로 살다가 드디어 “이게 아닌가 벼” 하면서 무엇을 포기하고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선포하는 순간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는 것도 우리의 삶이다.


홀황(惚恍)하다. 쭉쭉 뻗어나간 대간의 줄기는 꿈틀거리면서 저 멀리 덕유산까지 이어지고, 대간에서 가지를 친 지맥들은 야트막한 산성처럼 수십 겹으로 나를 감싸 안으니 나는 구중궁궐 천하의 지존이 된 느낌이다. 


어제는 그렇게 줄 듯 말 듯 보일 듯 말 듯 남의 애간장을 다 녹이더니만, 오늘은 있는 그대로 제 속살을 까짓것 보여 주니 이게 무슨 조화인고? 정녕 사랑할 때의 모습이 아닌가? 부끄럽고 수줍어 담장밖에 조차 그림자를 비추지 않았던 낭자가 천 리 머나먼 길 떠난 낭군이 돌아올 때면 꽃잎을 활짝 열 듯 제 속살을 다 보여 맞이하니 이게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법은 땅이요, 땅의 법은 하늘이요, 하늘의 법은 도이며, 도의 법은 자연이라(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내 안다. 이 시간이 한두 식경뿐이라는 것을. 이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닫힌다는 것을. 한 번 이 맛을 아는 자는 잊지 못하여 다시 찾는다는 것을. 그래서 지리산을 안 오른 자는 있어도 한 번만 오른 자는 없다.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에 오른다. 좌측에 천주(天柱)라는 암각이 있고 우측에 일월대(日月臺)라는 암각이 있다.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에 올라서 해와 달을 함께 본다. 


오호라, 또 이 무슨 기이한 인연인가? 내 책 <부자는 사회주의를 꿈꾼다>의 표지 그림이 폴 끌레(paul Klee)의 강렬한 꿈(strong dream)이 아닌가? 



“그의 얼굴을 햇볕과 달빛을 받아 불그스레하고, 언제라도 하늘로 오르기 위해 날개를 덮고 잔다. 달이 해를 품으려 한다. 그의 꿈, 부국이 나의 꿈이로다.”


참말로 환장해 부려.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알면 전율이 된다. 내 여러 번 천왕봉에 올랐지만, 천주와 일월대가 암각화 되었다는 사실은 경감님을 통해서 알았으니, 이 장엄한 모티브는 또 무엇인가?


바람이 참으로 거세다. 내 정상 사진을 보니 꼭 청나라 팔기군 같다. 글쎄다. 내가 진짜로 전생에 팔기군이 되어 닷새 만에 압록강을 건너 한양 땅을 점령한 후 만주벌판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해보니 앞이 깜깜하여 이곳 두류산에 눌러앉은 것이 아닐런지?


정상에서 인간 대동여지도 경감님께 광양 백운산, 광주 무등산, 장흥 팔영산, 장수 남덕유산, 무주 덕유산, 김천 황악산, 거창 수도산, 합천 가야산, 합천 황매산, 산청 웅석산, 사천 와룡산, 거창 거열산, 안의 황석산, 안의 기백산, 안의 금원산, 함양. 금대봉 등 일일이 발아래에 있는 모든 산을 점고하고 드디어 하산을 결정한다.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하산하는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조심조심 법계사에 이르러 한숨을 고르는 사이, 정쌤이 적멸보궁에서 108배 기도를 드린다. 



내 어찌 가만있을 손가? 나도 응원 기도 9배를 드리고 조용히 물러나니 풍경소리가 요란하게 적멸보궁을 흔들면서 금낭화와 데이지가 바람 따라 부러질 듯 춤을 춘다. “옳거니” 천왕봉이 빤히 보이는 이곳에서 정갈한 마음을 찾는 공덕만으로도 충만하니라.


큰 것은 흘러가고, 흘러간 것은 멀어지고, 멀어진 것은 되돌아온다. 우리는 하산길에 하루 2번 천왕봉을 오르는 쌀집 아저씨를 만났고, 또 천리행군을 하는 공수여단 장병을 만났으며, 진주에서 오신 경감님의 친구분도 만났다. 


서울로 떠나기 전에 남사 예담촌에서 비빔밥에 동동주 한잔으로 1무 1박 지리산 등정을 마치고, 함께 오신 두 분 오공님과 산사랑님이 칠순 때 한복을 입고 천왕봉을 등정하기를 우격다짐하면서, 나는 그때 분명 ‘회’를 사 들고 응원 산행하겠다고 약조했다.


*사진은 지리산 정상 모습(2024.5.27.)




작가의 이전글 무거워야 조급해지지 않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