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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공정 May 02. 2024

30여 년만의 답장

30여 년만의 답장


문민정부 시대를 이끌었던 김영삼 대통령 퇴임 즈음에 

그분의 3대 치적이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첫째는 일제의 잔재라는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한 것이고 

둘째는 IMF를 통하여 남북 간의 빈부격차를 상당히 해소(?)하셨다.


셋째는 밝히지 않을 것이니 각자가 알아서 풀어보는 숙제로 하자.

물론 우스갯소리로 잠시 유행했던 농담이고,

이분은 경제 분야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했다고는 하나,

역사바로세우기나 금융실명제 등 굵직한 업적도 있음은 사실이다. 


하여간 참으로 긴 세월이 흘렀는데,

각종 행사에서 맨 먼저 국민교육헌장이 낭독되던 국민학교 시절에, 

우리들은 모두가 아름답고 애틋한, 어쩌면 사랑에 근접한, 

소중하고도 비밀스러운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 중학교 동창 카페에, 

내가 그런 첫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부끄러운 추억으로 여기는 A의 나에 대한 짝사랑을

달콤하고 아름다운 첫사랑으로 전환해줬다는 이야기를 쓰려한다. 


초등학교 여자동창, 남자동창이라고 말하면 

졸업앨범사진을 보지 않고도 떠오르는 얼굴들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친구들은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만나면 아는 친구들이지만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아이들 말이다. 


B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을 것이다. 

B의 집안 형편도 어려웠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이다. 

우리 집은 다행히도 하루 세 끼를 다 챙겨 먹을 정도는 되었고, 

강력한 혼·분식 장려로 담임선생님께 도시락을 검사받던 시절이다. 

            

대개는 보리밥으로 쌀밥을 살짝 덮어서 위장했다.

노래는 얼마나 지겹도록 불러댔는가.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앉아 꽁당보리밥 보리밥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B라는 여자애는 잠시, 한 달 정도 내 짝꿍이었다. 

2인용 긴 책상, 넘어오지 말라고 가운데에 선을 그었던, 

반주에 맞춰 동요를 부를 때 풍금소리가 제일 듣기 좋았고, 

그 풍금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악기로 알고 지내던 시절이다. 


4학년쯤일까 점심시간에 변또라 부르던 도시락을 먹을 때였다. 

밥이 차가운데 난로가 없었으니 이른 봄이나 늦가을쯤일 것이다. 

여자 짝꿍의 노란 양은도시락 뚜껑 속 밥이 뭔지 궁금했다. 

힐끗 보니 밥이 아니고 밀개떡에 보리쌀이 적당히 박혀 있다.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행동으로, 

다른 애들이 볼까 재빠르게 나의 쌀밥을 절반이나 퍼주고, 

그 아이의 보리쌀 섞인 밀개떡 한 움큼 뚝 떼어 가져왔다. 

숟가락으로 썰 듯 떼서 한 입 먹어보고는 바로 후회했다. 


차가운 것이 싫었고 아무런 맛이 없어서 더욱 싫었다.   

도시락 반찬이라면 그저 김치 한 가지밖에 없었던, 

어쩌다 바뀐 깍두기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던 시절이다.

그래도 그날은 물리도록 먹던 김치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 김치를 의지해서 서너 숟가락 떴을까 보다. 

서로 밥에 대한 반응이 궁금했는지 짝꿍 B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쌀밥을 달게 먹으며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맛없는 밀개떡을 먹어야 할 운명인 나도 그냥 웃어주었다. 


짝꿍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에게는 작은 의무가 생긴다. 

밀개떡을 끝까지 다 먹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 말이다. 

어린 나이에 사나이의 무슨 체면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남자니까 할 수 있어!  다 먹을 수 있어!


그러면서 맛없는 밀개떡을 억지로 먹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커지는 듯, 정말 이상하게도,

짝꿍이 내 삶 최초로 여자라는 이성으로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엄마 품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한 발 내디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B를 만나

“반갑다, 친구야! 더 예뻐졌네. 내 짝꿍이었는데 생각나니?” 

“몰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밀개떡의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C와 D도 사연이 있다.

그들은 엄마가 학교 선생님이고, 아빠가 목사님으로 

우리네 부모님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최고의 엘리트였다. 

옷 하나라도 달리 입혔으니, 남자애들의 짝(첫)사랑 0순위이다. 


어느 날 C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교단에 올라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낭랑한 목소리로  

선생님이신 엄마의 전근에 따라서 자기도 전학 간다고 말한다.

그 애의 무척이나 세련된 작별 인사에 모두가 놀랐다.


마음의 정리가 끝난 듯 책가방을 챙겨 들고는 

유곡리 자기집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한다.

C는 여자애들 60여 명 중에 유일하게 안경을 썼고,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동화책을 많이 읽은 똑똑한 아이다.


숨이 찬지, 아니면 다니던 학교를 한 번 더 보고 싶은지 

언덕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우리 쪽을 바라본다. 

남자애들 여럿이 그 아이가 떠나는 모습을 같이 보고 있었는데, 

이별이 생소했던 때라 손을 흔들어 주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나 역시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을 흔들지 못했고, 

수업종이 울려서 친구들은 모두 교실로 들어갔다. 

다만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모습까지 본 사람은 나뿐이다. 


무슨 심리였을까?

아마도 여러 명이 C를 좋아하는 것이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애틋한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35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으니 난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다. 


C가 떠나는 모습을 함께했던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코흘리개 그 어린 시절을 회상시켜 주곤 하는데, 

그 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동창들이 더 많았다. 

무정한 세월이 그렇게도 고운 추억들을 하나씩 지우는 것이다.


나는 그 애가 대전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 간 것도 알고 있는데 말이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짜식들! 나 따라오려면 멀었다. 

너희들이 내가 좋아했던 C를 알기나 해?”


D라는 목사님의 딸, 긴 머리를 통으로 묶어 말총머리로 다녔다. 

가을 운동회 때는 청군의 여자 대표로 계주선수다. 

얼굴 예쁜 친구는 모두 달리기를 잘하는 줄 알았다. 

옷도 잘 입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선 패션으로 말이다. 


그런데, 당시 나는 목회자는 무서운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어서 

깔끔한 모습의 그 애가 좋기도 했지만, 일정한 거리도 있었다.

이 아이도 목사 아빠를 따라 전학 갔는데 작별의 기억은 없다.

E, F, G 계속할까? 아니다. 모두 탕진하면 나중에 쓸 얘기가 없다. 


이제 다시 A로 돌아와서, 

여자동창 A는 남편의 아내요 자식들의 어머니로 

부족한 것 없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줌마렐라’도 될 수 없는, 

키가 작고 코가 오뚝한, 나이 50을 앞둔 평범한 동창 중 한 명이다.


매년 12월 첫 주 토요일에 인천에서 초등학교동창 송년회를 한다.

A는 자신의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때로는 유행가 가사처럼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 웃기도 하는데, 

유독 내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도 작아지며 수줍어한다.


만날 때마다 그 모양이 변함없어서 나에게는 적잖은 고민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저 아이 고무줄놀이 고무줄을 잘라놓았나? 

소변볼 때 화장실 문을 열었나? 아니면 치마를 들춰봤나?

대체 무슨 민망함이 있기에 저리도 부끄러워하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각별한 추억이 없는 아이다. 

그저 이름과 얼굴이 연결되는 정도로 착하고 평범한 애, 

나와는 특별한 사연이 없는 여자 동창임이 틀림없는, 

하지만 저 표정으로는 분명히 있는데, 도대체 그게 뭐란 말이냐? 


장면을 바꾸어 잠시 딴소리를 좀 해보자. 

수년 전 모든 경비를 지원해 주는 중국 정부 초청으로

베이징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중국어쟁이들과 

한 달 동안 공부하고 2주는 여행도 하는 행운을 누렸다. 


상하이에서 점심 식사 후 담배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그날은 해는 없어도 습하고 무척 더웠다. 

식당 앞 도로 양쪽에 길게 늘어선 울창한 가로수가 

전지(剪枝)를 잘해서 상당히 고풍스러웠는데 플라타너스였다. 


유곡초등학교 운동장 서편에 플라타너스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남자애들이 공을 찰 때는 자연스레 축구 골대가 되어준 나무다. 

한여름에는 전교생의 더위를 식혀주는 엄청나게 큰 아름드리로 

여자애들은 나무 그늘에서 공기도 하고 고무줄도 하며 놀았다.


상해에서는 그 나무가 한껏 멋을 내며 운치있는 가로수가 되었고, 

가이드가 말하길 상하이 명물로 중국어로는 [프랑스오동나무]란다.

그 가로수 밑에서 일행 중 한 명인 키가 작고 코가 오뚝한

우리 또래의 모스크바 여인이 그윽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 같은데, 

소련 여자 얼굴 위로  A라는 여자애 얼굴이 포개졌다가 사라졌다. 

어? A가 왜 여기서 나와? ∼∼ 아! 그래! 그거였구나! 

그 아이가 내 앞에서 그토록 수줍어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유곡초등학교 운동장 그 플라타너스나무 아래에서, 

A는 나에게 누가 볼까 불쑥 쪽지편지를 주고는 급히 사라졌다. 

5학년 때인지 6학년 때인지는 분명치 않은데, 

진달래꽃으로 멋 부리기 시작하는 편지글로 보면 분명 봄이다. 


초등시절 나는 살아있는 뱀을 목에 감고 다니던 천하의 개구쟁이로 

여자애들의 마음속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여간, A는 엄청난 용기로 소위 연애편지를 써서 남몰래 주고는, 

며칠 동안이나 콩당콩당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을 것이다. 


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못 했을 것이다. 

그때 나의 관심은 온통 개구리나 도요새 물새알에 있었다. 

돼지에게 삶아주고 싶은 개구리와 내가 삶아 먹고 싶은 물새알이다. 

다행인 것은 순진하게도 그 엄청난 비밀만큼은 유지해 주었다. 


그 시절 티 없이 맑았던, 나를 좋아했던 마음이 

만나기만 하면 다시금 이른 새벽 강가에 물안개 피어나듯 하니 

설레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가슴 두근거림은 당연하지 싶다. 

나는 A라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 동창에게 큰 죄를 지은 셈이다.  


한 달 반 만에 귀국하여 아내와 와인 한잔하면서 

여자 동창에게 이런 미안함이 있다고 하니 간단히 해결해 준다. 

지금이라도 당장 답장을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뭐. 


A4용지를 반 접어서 썼다. 여보! 이 정도면 되겠어?  

내용이 없는 글이라서 읽고 지지고 할 것도 없다. 

아내 말하길, “무슨 얼어 죽을 사랑이야! 

그 나이 때는 사랑보다 더 좋은 게 [좋아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서 나머지 반쪽에다 다시 썼다.              

"........그 편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단다.

사실, 그때 나도 너를 정말 좋아했어. 

나 엄청 개구쟁이였었지?  - 긍표가 -"


그런데 요놈의 편지를 어떻게 전해주어야 좋을꼬? 

12월초 인천에서 하는 동창 송년회를 기다려 전하기로 했다. 

지각한 나는 빙 돌며 악수하고는 A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았다. 

이날도 A는 여전히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이다. 에구, 순진하기는! 


이 나이에 동창들에게 옛 사연이 밝혀진들, 

또는 지금 이 연애편지(?)를 들킨들 어떠랴! 

다만 A가 나에게 수줍음으로 다가왔듯이 

나도 그녀에게 설렘으로 전하는 것이 예의이다. 


누가 봤을까 못 봤을까를 자연스럽게 연출해야 한다.

화장실 가는 A에게 플라타너스나무 아래 그 모습과 똑같이,

미소 지으며 살며시 손에 넣어 주고는 얼른 자리로 돌아왔다.

화장실에서 읽었겠지만, 나는 C에게 더 이상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1년 후 또다시 동창 송년 모임이 있었다. 

30여 년만의 쪽지편지 답장은 실로 대단한 위력이다. 

나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잔하잔다. 

어엿한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하지만 보기 좋았다. 


마음만 들켜서 부끄러웠던 30여 년 전의 짝사랑이

읽고 지지고 할 것도 없는 반장짜리 쪽지편지 답장으로, 

그토록 바라던 기분 좋은 첫사랑으로 바뀌었으니,

가히 그 남자 주인공과 한잔할 만도 하지 않은가? 


친구들이여! 40년 전 초등학교 추억을 정성껏 길어 올려보자.

그 시절의 아름다운 사연을 곰곰이 아주 곰곰이 회상해 보자. 

그대들 역시 가물가물해지는 고왔던 사연을 재생할 수 있고 

가슴 속에 묻혀가는 첫사랑을 꺼내서 예쁘게 화장해 줄 수 있음을! 


그래서 나는 카페 가입인사에 “우정도 화장하니?”라고 써 보았다.

친구들과의 우정과 사랑을 회상하기 딱 좋은 나이다.

모스크바의 모대학교 중국어과 아줌마교수가 참 고맙다. 

키가 작고 코가 오똑한 그 슬라브족 여인은 한국 담배를 좋아했다.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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