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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바트로스 Nov 22. 2024

고슴도치의 자주빛깔 꿈

체류증 발급받으러 가는 길. 

이방인이라는 나의 신원이 재인식되는 날이다.

다양한 색깔 눈동자와 마주치면, 언제나 유순한 눈빛으로 응답하는 나. 

체류증 없는 그 나라로 회귀하고 싶은 충동, 새싹처럼 올라온다.

     

학생증과 1년 동안의 은행거래 내역 사본을 제출했다.

학생증은 프랑스 체류자격신분 확인용이고, 은행거래 내역은 유학생의 자금출처를 점검하는 목적이다. 대학 등록기간이 10년인 반면, 등록금은 1년에 67,000원 정도로 거의 무상 수준인 프랑스. 

은행거래내역 점검 목적은 대학 등록만 계속하며, 장기간 취업하는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신임 노동부장관법령으로 – 매달 2500프랑(본국에서 송금받은 내역; 대략 50만 원) 입출금 출처와 노동시간을 20시간으로 제한함으로써 - 심각한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인 셈이다. 그 목적에 합당하게 담당자는 은행거래 내역을 꼼꼼하게 살핀다. 


그 시간은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조마조마한 나머지, 마음과 몸이 오그라드는 착각이 들 정도다.       

처음으로 체류증 발급이 거부당한 그날! 

지금도 사진처럼 선명하다. 깡마른 왜소한 그녀는 푸른 눈동자로 아래위로 나를 스캔하며, 은행거래내역을 몇 번이나 살폈다.  

마침내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통장 잔액이 부족하네요.”

미소 띤 얼굴로 학생증과 통장거래 내역 자료를 나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미소도. 푸른 눈동자까지도.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얼음처럼 차갑게 보였다. 


그 한기에 전율하며, 곧바로 귀가했다  

오전 11시도 안 된 이른 시간에 귀가한 모습에 놀란 욜랑,

“얼랄라아! 무슨 일인데? 왜 이렇게 일찍 왔나? 어디 아파?”

“안 아파요.”

갑자기 목구멍이 콱 조여오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그 사무실로 전화한 욜랑,

“... 깜빡 잊고, 알바 비용을 송금 못했네요. 지금 입금시킬게요...., 필요하다면,  나도 동행할까요... 지금, 체류증 발급해 준다고요?”


당장 사무실 전화번호 대라는 그녀의 재촉에 잠깐 머뭇거렸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봐 겁난 새가슴으로. 

예상과는 달리, 마치 뚫어 뻥처럼 단숨에 문제를 해결한 그녀. 뿐만 아니라 덤으로 내 역성까지! 

“유학생에게 지나치게 깐깐하게 구는 것 같아서, 대단히 유감스럽네요.”

연이어 나를 감동시킨 그녀의 제안!

“매달 2500프랑을 네 계좌에 송금시켜 줄게. 일주일 뒤에, 내 계좌로 다시 입금시켜 주고. 어때? 말끔히 해결됐지? 차~암 영리한 프랑스 엄마지?” 

큰 팔을 벌리며 다가와서는 볼 부비는 그녀, 우리 어매 같았던 순간이다. 


한번 퇴짜 맞은 이후부터, 체류증 만드는 날이면 어김없이 긴장했다. 

겁먹은 나머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트라우마 증상이 나타날 정도였다. 

연달아 꿈틀대는 연어의 회귀 본능도! 그러나 그 생명체와 나, 우리의 목적은 달랐다. 연어는 알을 낳기 위해서 강 상류로, 나는 체류증 없는 나라로! 

너무도 강렬한 회귀본능은 전신이 가라앉는 지독한 몸살까지 수반했다. 접착제처럼 침대에서 엎드린 채로 상상한 모습은 한국공공기관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나. 이 달콤한 상상은 강력한 마취제처럼, 몸과 마음의 통증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긴 표류 끝자락 몽환 속에서 떠 올린 한국에서의 당당한 내 모습은, 긴 밤을 갈아엎는 여명의 쇠스랑처럼 강력했다.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온몸이 개운해졌다. 

온종일 밭갈이로 지친 소가 긴 밤이 지난 후, 이른 아침에 농부가 끓여준 따뜻한 여물을 먹고는 가뿐히 일어나는 것처럼. 

그 강력한 기력보충제는 체류증 없는 나라에서 살아갈, 당당한 내 모습!  

                        *

한국 서울 주민 센터에 왔다. 장롱 운전면허증을 갱신하기 위해서다. 

겨울한파가 파고드는 아침시간, 민원인이 별로 없었다. 독서 중인 담당자에게 방문 목적을 모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를 힐끗 쳐다보며 뭔가 총알처럼 읊어댔다. 독서 방해꾼인 나를 회피하며, 곧바로 다시 책을 읽는 그녀. 총알처럼 쏟아지는 한국어, 뒷부분만 겨우 알아들었다. 

“경찰서는 왜 가요?”

귀찮다는 표정과 어투로, “여기가 아니라고요. 경찰서로 가라고요!”

더 퉁명스럽고, 더 빠르게 내뱉었다. 

다시 책에 집중하는 당당한 그녀, 

“참으로 무례하군.” 

힘없이 중얼거리며 문을 나서려는 그 순간, 갑자기 나를 막아서는 데자뷔! 

특권인양 푸른 눈빛으로 체류증을 퇴짜 놓던, 무례한 그녀의 얼굴!

훅하고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주민 센터 문을 나서다가 되돌아가서, 그녀 앞에 다시 섰다.

“아가씨”

더 뿔난 목소리로,

“아니, 왜 또 그래요? 운전면허 갱신은 경찰서로 가야 된다고요!”

“그 말은 이해했어요. 처음부터 경찰서관할이라고 설명해 주면 얼마나 좋아요? 나처럼 잘 모르는 민원인 덕분에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 아닌가요?”

“설명했잖아요. 그런데도 못 알아들어놓고서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다시 책 읽는 무례한 그녀에게

“금방, 이해 못 할 수도 있지. 그렇게 짜증스러워요? 여기가 아가씨 개인 방인가요?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는 정부에서 민원서비스 목적으로 마련된 일자리 아닌가요? 아가씨 독서하라고, 내가 세금 낸 줄 알아요?”

그토록 내가 듣고 싶은 사과대신에 오히려 도끼눈까지 뜬 그녀,

“내가 언제 짜증 냈어요? 크게 말했을 뿐이거든요. 기가 막혀서!”  

“짜증 낸 얼굴 아니라고요? 거울 줄까요? 

그녀는 좀 전의 열독 상태로 다시 되돌아갔다. 이번엔 아예 깡 무시 태도다.

”성깔은 집에서 부려요! 웃지 않아도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얼굴에다가 성깔까지! 

“뭐라고요? 아침부터...”

“출근할 때, 성깔은 집에 두고 오세요! 민원인에게 못된 성깔 부리지 말고!”


난동 부리는 꼴로 비쳤을까?

갑자기 두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나를 에워싸며, 

”여기서 큰소리치면 안 돼요! 뒤쪽 조용한 사무실에서 함께 이야기합시다! “ 

그 순간에 완전히 뚜껑 열린 나. 

”여기가 청와대인가요? ‘5공 착각하는 공무원’ 헤드라인으로, 사회면에 큼직하게 내줄까요? 아저씨들,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싶나요? 

갑자기 뒤로 물러선 그들. 예전 최루탄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프랑스에서 꿈꿨던 그 장면, 한국에서 마침내 실행한 날. 

투우사처럼 멋진 승부는 아닌 것 같다. 표면상으로는 이긴 것 같은데. 당당하지도. 후련하지도. 행복하지도. 

프랑스에서 체류증 발급 퇴짜 받던 밤에 상상한 꿈, 한국공공기관에서 당당한 내 모습은 얼마나 큰 위로를 주었던가! 

실제는 너무나도 상이했다. 무엇이 문제였나? 

모국어로 말했으니 의사소통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한파날씨에 낡은 누비코트로 술독처럼 싸맨 꾀죄죄한 내 차림새 때문일까? 

푸대접당한 원인 탐색에 몰두한 나머지, 앞서 오던 남자와 거의 부딪힐 뻔! 

당황한 유난히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프랑스에서 나처럼. 

한국겨울의 모진 냉기로 이방인의 피부는 더 칙칙하게 보였다, 예전 나처럼. 

데자뷔!

그 낯선 이방인의 어두운 눈빛이 마음속으로 계속 뒤엉켜 들었다. 

“저 남자도, 오늘 체류증 퇴짜 당했나? 들통나면, 강제출국 당할 텐데... 

칼날 같은 이 겨울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먹을 것은 있나?”

오지랖 걱정 퍼레이드가 지나간다. 마치 내일인양, 코끝이 찡해진다. 

몇 번 되돌아본 것이 전부였다, 화살기도와 함께. 

프랑스 유학 이전에 나는,

“자기 나라에서 마음 편히 살지 않고, 왜 남의 나라에서 사서 고생하누?

이전의 웅성거림은 마음속에서 들리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긴 표류 이후에는.    

  

이방인의 멍든 그 꿈, 비로소 내 나라에서 실현된 오늘! 

프랑스에서 상상했던 당당한 모습대신, 고슴도치의 그 자주빛깔 뿔이 뭉그러졌다.

오래전에 냉대받았던 그 상처에서 모진 뿔이 자라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숨죽이며 은둔하던 고약함이 ‘이때다’ 하고, 박차고 나온 걸까?  

존중하지 않는 무례한 태도로 불협화음의 상처를 서로 주고받은 날이다. 

자신의 무례한 언행 때문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는 고백은 별로 듣지 못했다. 

나도 그 부류인 것 같다, 씁쓸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한국, 프랑스에서 오매불망 꿈꾸었던 그 나라인가? 

그런 땅으로 와닿지는 않나 보다. 

아직도 시인 보들레르의 자화상이 – 거대한 날개로 선창에서 뒤뚱대는 천상의 새 알바트로스 –강한 자석처럼 여전히 내 영혼을 끌어당기고 있다. 

그 오랜 영혼의 짝 알바트로스가 새롭게 태어난다, 글바트로스로!    

일상의 빙판에서 뒤뚱댄 날, 브런치스토리에 생겨난 깃털 하나.

고슴도치의 자주빛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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