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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재원 Aug 11. 2024

가마쿠라(鎌倉)에서

<쇼코의 미소>를 읽고...


 아가, 잘 도착했니?


 잠시 집 앞 가게에만 다녀와도 흠뻑 젖어 버리는데 그곳은 어떤지 궁금하구나. 요즘 낯빛이 어두워 마음이 쓰였는데 떠나기 전 날은 모처럼 생기가 돌아서 잘 지내리라 믿는다. 겨우 일주일인데 하늘에 구름 떠 가듯 시간이 더디 흐르는구나. 하염없이 분꽃만 바라보는 중 모처럼 쏟아지는 소낙비 덕분에 마음속 묵은 때까지 씻겨 버리고픈 그런 오후란다. 이곳은.


 어제는 일찍 잠에서 깨어 시치리가하마에 다녀왔단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여기까지 오는데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파도가 칠 때마다 허물어지는 모래성을 다시 쌓는 아이들과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예전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는구나. 그땐 여름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다 같이 이곳에 놀러 왔는데 말이다. 꽃게 한 마리 잡아 주고픈 마음에 울퉁불퉁 검은 바위틈 사이로 나무젓가락을 휘젓곤 했지. 그렇게 겨우 잡은 꽃게 다리가 하나 부러져 있어서 불쌍하다며 서럽게 울던 네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구나.


 인파를 피해 한적한 곳을 찾아 물에 젖은 모래사장을 따라 맨 발로 오랜 시간 걸었단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멈추니 이곳에 잠들어 있을 네 아비 생각을 걷어낼 길이 없구나. 그날은 배 타는 걸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이제 좀 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파도가 발을 스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욱신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네. 한참을 걷다 뒤돌아 보니 내가 남긴 발자국들은 그새 자취를 감췄는데 말이다.


 차라리 목놓아 울기를 바랐는데, 니 아비가 실종되고, 그리고 어미마저 아비를 따라 떠날 때에도 미동조차 없는 네 앞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단다. 멍한 눈빛으로 대문 밖을 하염없이 응시할 때면 혹여 너마저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조바심에 하릴없이 네 곁을 서성거리기만 했구나. 어두운 방을 밝히는 촛불이 혹 꺼질 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 불빛에 기대어 덕분에 살아올 수 있었는데, 그 시간이 네 마음에 그을음을 더한 건 아닌지...


 아가야, 감히 네게 말하진 못했지만 언젠가 너와 함께 다시 바다를 찾는 날을 꿈꿔 본단다. 넘실거리는 물결 사이사이에  네 마음속 응어리를 쏟아 내고 그저 저 멀리 흘러가게 놓아두자꾸나. 그리고... 홀가분하게 더 넓은 세상으로 너를 떠나보낼 그날을 두려운 마음으로 소망해 본다. 누군가 그러더구나. 무신론자인 자신에게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 결심하는 거라고. 그렇더라도 너를 놓아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라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련다.


 네가 떠난 하루하루를 어디에 의지해서, 의미를 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 불과 일주일 남짓의 시간도 어찌할 바를 몰라 낯선 곳에 온 마냥 두리번거리는데 말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한참인데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네. 몇 번의 낮과 밤이 지나면 네가 돌아올 테지만 그때까지 빗소리에 취해 잠이나 푹 자두련 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서 현관문 앞에 환한 미소를 지은 너를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네가 좋아하는 시라스동 만들어 둘 테니 건강히 잘 지내다 오려무나.


 95년 7월 가마쿠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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