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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재원 Aug 26. 2024

권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사르트르의 [구토] 편을 읽고...

 하릴없이 사무실에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출근길부터 마음에 돌 하나를 얹은 기분이다. 회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다. 동료 직원들은 각자 무언가 하고 있고 나만 덩그러니 남겨져 하릴없이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일하면서 월급 받는 게 민망한 수준이다. 고객사에서 문의 전화가 온다. 이거라도 해야지 수화기를 들었는데 통화가 길어지고 같은 얘기가 반복되니 금세 피로감이 몰려온다. 이렇게 살다 끝나는 걸까?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에 안도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과 염려가 불쑥 고개를 든다.


 어느덧 점심시간. 늘 혼밥을 하기에 홀로 사무실에 남아 있다. 작렬하는 햇살을 뚫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십수 년 전 사업을 시작하면서 책상 앞에 붙여 두었던 자기 선언문이 눈에 들어온다. 10년 후, 20년 후 앞날에 대한 밑그림을 하나하나 더듬어 자연스레 지금의 나와 견주어 본다. 호기롭게 써 내려간 문장들과 현재 내 모습 사이에서 건너기 힘든 간극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원대한 꿈을 구웠던 사업은 그냥저냥 정체 상태이고 아내와 둘만의 여행은 육아에 묶여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화목한(?) 가정을 꾸린다는 문구만 지금 시점에 유효하다.


 늦은 밤 글을 써내려 가면서 가슴 뛰는 삶을 살리라 다짐했던 그날의 간절한 절박함은 시간의 무게에 눌려 뭉개졌고 평온함과 좀 더 나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슬며시 그 위를 덧입혔다. 더 이상 이전처럼 전전긍긍하거나 촉을 세우고 혼자 불온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대신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걸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줄어든 건 분명하지만 적어도 부족한 에너지를 덜 낭비하도록 마음의 공간은 한 뼘 넓어졌다. 그럼에도... 점점 더 인생이 시시하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지난해 늦가을 그토록 염원했던 29년 만의 우승을 거둔 순간, 밀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여보, 일루 빨리 와봐!" 평소 호들갑을 떨지 않는 아내의 재촉에 고무장갑을 낀 채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과 관중들을 지켜봤다. 쓰라린 패배의 경험에 익숙해서일까, 아니면 더 이상 승부에 집착할 열정이 부족한 걸까. 우승 세리모니를 지켜보는 아내에게 고무장갑 구멍이 뚫려서 물이 찬다는 볼멘소리만 했다. 강산이 바뀌는 동안 매년 어김없이 야구장을 찾아서 무적엘지를 부르짖곤 했는데, 이번 생에 우승 한 번 하는 걸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막상 그 순간을 멀뚱히 바라보며 애꿎은 고무장갑만 연신 뒤집고 있다.


  "삶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진심으로 나는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텅 빈 껍데기일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는 거북한 존재다." <구토> by 사르트르


 인생을 반쯤 산 것 같은데 나머지 절반을 어떻게 보내야 좀 덜 지루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온 힘을 다해 달성하고픈 목표도, 나를 채찍질했던 과업도 사라진 지금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를 반복하고 있다. 버킷리스트라도 적어볼라치면 서너 가지를 넘지 못해 내가 하고 싶은 게 이렇게 없구나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너무 빨리 늙어버린 기분에 서글픔마저 몰려온다.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 '실존(existence)' 하는 거라고 역설했다. 특별히 지향하는 바도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실제로 산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건 아마도 몰입에 다름 아닐까 짐작해 본다. 시간의 흐름과 한 발짝 떨어져서 한 대상에 집중하는 중에 느끼는 충만함... 지금의 내가 찾은 해답은 일단 여기까지다. 기왕 몰입할 거라면 좀 더 자신에게 의미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할터,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고, 읽고, 그리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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