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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재원 Sep 19. 2024

레오 버스카글리아 선생님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를 읽고...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 전 본 영화 속 주인공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생각해 보니 두 분이 놀랍도록 닮으셨네요! 덥수룩한 턱수염에 이탈리아 사람 특유의 낙천성까지…)


  이별 여행에서 돌아온 엘리오에게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우리 몸과 마음은 단 한 번만 주어진 것이고 너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닳고 닳게 된다는 걸..(중략)…. 지금은 슬픔과 아픔이 있어. 그걸 없애지 마라. 네가 느꼈던 기쁨도 말이야.”


 지난 많은 날들을 끊임없는 자책과 반추의 시간들로 채워와서 일까요? 언젠가부터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함에 기대어 안주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저를 몰아붙이고 싶지도, 그럴 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의 평화와 무료함은 한 끗 차이더군요. 간절히 이루고픈 목표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어영부영 살다가 끝나버리는 건 아닌지 문득 두려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삶을 완전하게 살아주지 않는 건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꽉 누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일 년 전 어느 여름날 이른 새벽잠에서 깨어 잠자리채와 수조 통을 들고 집 앞 안양천으로 향했습니다. 전 날 비가 와서 수풀 사이사이 웅덩이마다 물이 가득 차 있었거든요. 쭈그리고 앉아서 꼬물꼬물 거리는 올챙이 몇 마리를 빛의 속도로 낚아채서 물통을 찰랑거리며 집으로 가져왔지요.

“얘들아, 아빠가 올챙이 잡아 왔어!”

“…”

큰 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예 방에서도 나오지 않고 둘째는 잠깐 얼굴을 비추더니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다시 자리에 눕더군요. 꼬맹이만 눈을 비비며 잠시 구경하더니 

“아빠, 얘네들 불쌍해. 가서 놔줘.”

 결국 저만 민망한 사람이 되고 말았지요. 이미 날이 밝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길들… 뭐,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올챙이를 놓아주며 혼자 피식 웃었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건 꼭꼭 숨겨 두었던 제 엉뚱함이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버스카글리아 선생님.


  이 글을 쓰는 지금 제 앞에는 검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지만 성수기마저 지나서 그런 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네요. 시끌벅적한 롱비치(Long Beach)에서 가족 분들과 만찬을 즐기셨던 선생님 입장에서는 "너 왜 그런데 혼자 갔니?!" 의아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구명조끼와 물 한 통, 그리고 스노클링 장비 하나 달랑 들고 다섯 시간을 달려 도착했는데 막상 물에 들어가려고 하니 벌써 제 머릿속에 경보등이 정신없이 울려 댑니다. 물이 너무 차가우면 어떡하지? 햇살이 별론데 물고기가 보이기는 할까? 갈아입을 옷을 안 갖고 왔는데 차 시트가 다 적겠군. 혹 물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누가 지갑을 가져가면 안 되는데...


  일단 전원부터 꺼야겠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신 것처럼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말을 건네고 집 안을 나뭇잎으로 수놓을 용기는 없지만(아마… 집에서 쫓겨날 겁니다), 마스크를 단단히 고쳐 쓰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풍덩" 삶의 한가운데로 뛰어듭니다. 


9월 10일 오후 

초곡항에서

재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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