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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재원 Jun 19. 2024

피로

 어느 곳이든 앉기만 하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를 때, 지하철에서 자리가 생길 때, 심지어 시끄러운 음악 아래 필라테스 레슨을 받기 전에도 틈만 나면 눈이 감긴다.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면 더더욱 시원한 에어컨 아래 양말까지 벗고 꿀잠을 재촉한다.


 아들과 함께 영화관에 가곤 하는데 영화를 끝까지 본 기억도 가물하다. 일 년 전쯤에는 <아바타 : 물의 길>을 보러 갔는데 현란한 화면에 눈이 어지러워서 삼십 분쯤보다 나왔다. 정작 물속 장면은 전혀 보지 못한 셈이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시간 모처럼 여유롭게 넷플릭스를 켜도 너무 많은 선택 사이에서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다 꺼버리기 일쑤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마라탕이나 야채곱창에 소주 한잔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다음 날 화장실 들락거릴 게 뻔히 보이면서도 입 속에 맴도는 얼얼함과 알코올이 몸속에 퍼지면서 찾아오는 멜랑꼴리함의 조합에 중독됐다. 나날이 불어나는 살도 난감했지만 먹는 순간의 쾌감을 제외하면 몸과 마음에 독이 되는 습관이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배달 음식을 먹는 일이 줄어들었다. 마라탕 대신 발사믹 소스와 견과류를 곁들인 리코타 치즈 샐러드에 맛을 들이면서 이전보다 일상이 가벼워졌다. 여러 샐러드 가게를 순례하다가 지하철 한 역쯤 떨어진 곳을 아지트로 삼다 보니 걷는 시간도 늘어났다. 며칠 전 추억 소환 차 주문한 마라탕은 왜 그리 강렬한지 겨우 건더기만 건져 먹고 국물은 버렸다.


  그래도 보는 것과 맛보는 건 좀 나은 편이다. 나이가 들면 청력이 떨어져야 할 터인데 점점 더 예민해져서 소음을 견디지 못한다. 카페나 식당에 가도 스피커 위치가 어딘지부터 확인하고 멀찍이 자리를 잡는다. 나 자신이 중년의 초입에 들어섰음에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떼로 모여 있는 장소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다. 사람들 틈바구니를 벗어나 홀로 조용히 머물 공간을 찾아 방황하다가 결국 찾은 안식처가 안양천 숲길이다. 


 숲에서는 혼자, 또는 둘이 대부분이다. 이어폰을 끼고 각자의 길을 말없이 걷는다. 새소리, 바람 소리만 간간히 귓가에 머무르고 풀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소음과 자극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숲은 나에게 마음의 템포를 늦출 공간을 마련해 준다.


 최근 들어 더 자극을 견디는 역치가 낮아졌음을 체감한다. 아이들과 어디 놀러 다녀오거나 모니터 화면을 한참 쳐다본 다음에는 조금이라도 쉬지 않고는 버티지 못한다. 빈 대야에 수돗물이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지던 시절은 지나고 이미 반쯤 찬 상태에서 줄줄줄 물이 쏟아져 금세 넘쳐 버리는 꼴이다.


 물이 넘치면 모두에게 유해하다. 집에서는 쉽게 짜증을 내고 사무실에서는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이미 바닥에 넘쳐버린 물을 박박 닦아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하여 대야 크기를 늘릴 수 없다면 쉬는 동안 만이라도 수도꼭지를 최대한 잠가야 한다. 스스로 일상을 간소화할 것을 강제해야 한다.


 더 이상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챙기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걸 깨달으니 자연스레 마음을 내려놓는다. 실수가 있더라도 웬만한 업무는 직원들에게 맡기고 아이들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도 차근차근 설명하려고 애쓴다.(이건 아직도 쉽진 않다) LG 트윈스 경기 하이라이트를 볼 때를 빼곤 TV를 켜지 않고 꼭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면 약속을 잡지 않는다. 그 대신 걷고, 읽고, 그리고 쓰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


  원치 않는 자극은 분명 우리를 피로케 하지만 덕분에 이전과는 다른 일상을 시험해 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피곤에 절은 모습에 낙담하다가 이제라도 진정 나에게 소중한 게 무엇인지 확인하여 다행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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