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철 작가와의 묵직한 만남
오래전의 짧은 인연이 다시 묵직하게 이어지는 기묘한 일이 있었다. 20년 전 유럽 자전거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ROTC 후배인 문상철 작가님과의 재회가 그랬다. 2005년 여름, 스페인에서 만난 문상철 후배는 당시 대학교 3학년의 진중하고 순수한 열정을 가진 ROTC 청년이었다.
나는 ROTC 중위 전역 후 제약사에 취업했다가 1주일 만에 퇴사하고, 불안함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혼자서 자전거 여행중이었다. 사실 그런 내 처지도 막연했지만, 이역만리에서 만난 후배와 맥주 한 잔은 꼭 같이 하고 싶어 서로에게 잠시의 시간을 내어줬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남들 가는 방향대로 돈만 보며 살지 말고, 자기 색깔대로 재미나게 살아봐라"는 어쭙잖은 조언을 했다던데, 나는 아직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크고 작은 5개의 회사를 힘들게 여행하며 홍보인에서 스피치라이터로 전문성과 희소성을 키워왔고, 다행히도 글을 쓰며 아직 굶어죽지 않고 있다. 틈틈이 6권의 책을 냈고, 그중 한 권인 《업무시간을 반으로 줄이는 챗GPT 글쓰기》는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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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기간 문상철 작가는 여론조사기관을 거쳐 충남도청에서 안희정 지사를 지근거리 수행했고, 이후에는 안희정 캠프 경선투표 수행팀장 등을 지내며 정치 현장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우리는 나이 차이가 4년 정도 나지만, 최고 권력자의 말과 글을 써왔다는 점에서 조금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유럽에서 처음 만났던 그의 열정은 20년간 더 뾰족하게 다듬어졌고, 모습은 조금 더 둥글어졌다.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문상철 작가가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첫 핵심 조력자였던 '문 선배'라는 점이다. 그는 안 전 지사와 함께한 7년의 기록을 담은 《몰락의 시간》을 통해 촉망받는 정치인이 권력의 맛에 취해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가감 없이 들려준다. 정의를 추구했던 안희정 지사가 자신을 키워낸 팬덤에 젖어, 어떻게 붕괴되고 결국 몰락했는지가 자세하게 나와 있다.
내가 본 이 책은 최근 2~3년 읽은 책 중 가장 흥미롭고, 가장 안타깝고, 가장 묵직하며 슬펐다. 이 책은 안희정 지사의 성장과 성공, 그리고 붕괴와 몰락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다큐멘터리다. '웨스트윙' 같은 묵직한 정치드라마로도 전혀 손색없는 내용에, 군데군데 드러나는 문학적 소양도 감명 깊었다.
"선생님, (그냥) 뽑아주세요." 이를 뽑는 그 고통 때문인지 재판 결과 때문인지 몇 방울의 눈물이 흘렀다. 눈물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믿고 의지했던 세상의 공평과 공정은 권력 앞에 무의미했다. 피해자들에게 함께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무기력했다. (몰락의 시간 중 발췌, 안희정 1심 무죄에 대한 표현)
보통 이런 책은 지루하기 일색인데, 읽는 내내 긴장했다. 한편으론, 결론을 이미 알고 있기에 무척 안타까웠다. 《몰락의 시간》은 안희정 지사만의 몰락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고 응원했던, 그에게 모든 정치적 열망을 내쏟았던 모든 사람들, 특히 문상철 작가 자신의 몰락이기도 해서 가슴 아팠다.
내게 손가락질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는 나와 함께 몇 년을 동고동락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좋은 기억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했었다.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좋은 정치를 하자고 함께 외쳤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변화된 눈빛과 거짓말하는 모습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몰락의 시간 중 발췌, 배신자로 낙인 찍힌 그에 대한 동료들의 날선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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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의 재회는 충정로의 포차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그에게 내 책을 선물했고, 나는 그의 책을 전자책으로 읽으며 수많은 밑줄을 그었다. 특히 권력의 변질과 인간의 나약함을 묘사한 부분들, 그리고 진실을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하는 순간들을 담은 구절에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개인에게도 역사가 있고, 그 역사는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나는 후배님과의 인연이 소중하게 발전하길 바란다. 나의 역사가 성장하길 바란다. 그의 역사가 새로운 기회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가 몰락의 시간을 넘어 도약의 시간으로 진입하길 바란다.
당일 약간의 허리 통증으로 컨디션이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충정로의 포차에 4시간 앉아, 그와 소주 4병을 기울였다. 나는 오랜만에 무척 즐거웠다. 스피치라이터, 수행비서, 작가로서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온 이야기는 어떤 것보다 매콤하면서도 담백한 안주거리였다. 나는 진심을 담은 글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그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오랜만의 값진 대화였다.
우리는 늦은 시각에 20년 전의 인연을 다시 떠올리며 진하게 악수했다. 진실과 상식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켜낸 문상철 후배. 그의 용기와 진심이 더 나은 세상에서 최소한의 보답을 받길 간절히 바란다.
또 한 번의 대선을 코 앞에 둔 지금, 그가 책의 말미에 남긴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대로 두어서는 결국 팬덤 조직을 잘 만드는 사람, 국민 여론을 잘 선동하는 사람,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정치인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