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y Jude, don't make it bad
리틀라이프_ 한야 야나기하라
※스포주의
자살이 우울증에 의한 병사라는 것을 리틀라이프를 읽고 나서야 이해했다. 리틀 라이프는 일종의 투병기다. 나아지다가도 악화되고, 자해하다가도 사랑을 하고, 마음을 조금씩 열기도 하고, 한 발짝 다가가기도 하고. 그의 투병기가 애처로울 정도로 격렬해서 마음이 쓰였다.
비록 슬픔과 수치, 자기혐오 속에 매몰되어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성장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아주 늦게나마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기도 했고, 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용기를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드가 자살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그는 진지하게 상담치료를 받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나는 그 이유가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던 주드의 유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에 '위로'에 대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상대방에게 나의 정이 닿을 때, 그 찰나가 위로의 순간이 아닐까..
공감과 이해도 중요한 것은 맞지만, 개인적으로 위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염려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정교한 유리장식처럼 아끼던 상대가 연약한 모습으로 깨져버릴 때, 완전히 부서지지 않게 완충역할을 하는 것이 위로다. 근데 요게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상처를 많이 받아서 내 마음 따윈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거지. 그럴 때 절망을 느낀다. 위로받는 것도 어느 정도의 기력이 남아있을 때나 가능한 일있은 것 같다.
잘못된 위로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지 알게 된 후로부터 누군가를 위로할 때 두려움이 앞선다. "
주드가, 또 워런과 앤디등의 인물들 모두 이런 상황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주드가 받은 사랑, 주드가 받은 애정, 주드가 받은 모든 연민에도 불구하고 주드가 내린 결론이 자살이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위에 열거된 추상적인 단어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늦추게 하는 일종의 치료와 (극단적 표현을 빌리자면) 연명의료 같은 것이었으니까. 자살이라는 우울증의 종착역에(모든 우울증 환자가 완치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님) 되도록 천천히 도달할 수 있게끔 보조해 주는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이미 주드의 상처가 너무 깊어 그들의 위로와 애정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조차 없었으니까.
한편으론 헤럴드와 워런의 좌절감이 뼈저리게 이해돼서 정말 안쓰러웠다. 저 절망감과 자괴감, 회의감, 무력감, 초조함과 걱정들, 자신의 대한 실망감과 상대방에게 지치는 마음, 그러나 동시에 상대방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던 그들의 마음에 많은 공감이 갔다.
또 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시키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나는 병원에 데려가기 주저했던 그들의 모습이 충분히 납득 갔다. 정확히 내가 저들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강제로 입원시킨다거나 의사 앞으로 끌고 가면 자칫 상대방의 신뢰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막상 그런 상황에 닥치게 되면 차마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 싫다고 사정하는 애 끌고 기어이 병원 가는 것도 힘들고, 그렇게 하다가 정말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워서 주저하게 된다. 다시 숨어버릴까 봐 염려도 들고.
제이미와 워런의 관계도 꼭 친구와 나의 상황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이 책이 꼭 나의 학창 시절을 담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우면서도 슬프다. 워런과 내가 겪었던 일이 얼마나 특별할 것 없는 주변인들의 섭리인지 알게 되어서, 이 이야기가 얼마나 보편적인 이야긴지 알게 돼서.
작가가 주드를 죽여서 한 편으로는 고마웠다. 어중간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아서 안도했다. (사실 주드는 처음 학대받던 순간 난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학대가 얼마나 잔혹한 행위인지 다시금 상기시켜 줘서, 저 강도의 학대 속에서 인간이 과거를 극복한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강력하게 말해주어서 고마웠다.
공감능력이 쓰레기인 게 도움이 된 건지, 읽으면서 감정소모가 많다거나 고통스럽진 않았다.
저 하늘에선 주드가 행복하기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