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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May 24. 2024

4. 운명에 맞서는 영웅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서사시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서양의 문학, 예술, 문화의 기틀이 된 작품으로, 그 위상은 인류 문학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다.


그리스 문학의 마스터피스, <일리아스>
저자 호메로스는 실존인물인가?


저자로 알려진 '호메로스'는 실존인물이라는 의견과, <일리아스> 및 <오뒷세이아>를 오랜 시간에 걸쳐 집필, 편집한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의견으로 갈린다. 고대 서사시들이 대개 그러하듯 <일리아스>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이야기가 추가되고 다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최초 집필한 자가 호메로스라는 한 명의 사람인지, 아니면 한 명으로 특정할 수 없어 모두를 호메로스라는 명칭으로 부르는지는 알 수 없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문체나 이야기 방식이 동일 작가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이질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는 것은 호메로스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리스 서사시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스는 그 화려했던 역사와 문화, 신화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두 개로 좁혀진다. 이는 그리스인들이 많은 작품을 남기려고 하지 않고, 하나의 완전하고 완벽한 작품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 입장에서 가치가 적다고 여겨지는 내용들은 사라지거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일리아스>는 첫 텍스트가 보존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치며 다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완전한 하나의 작품으로 고정한 시점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거치며 변형된 이후일 것이다. 작품의 태생이 이러하니, 실제로 호메로스라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일리아스>를 호메로스 개인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지도 문제다. 


이러한 쟁점은 뒤로하고 작품 이야기를 하자면 <일리아스>는 그 명성에 맞게 고대 그리스인들의 마스터피스라고 할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흥미롭다. 문체부터가 기원전 700여 년의 작품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앞서 읽은 <마하바라타>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하고 현란한 수식어들이 가득하며 그 표현력이 감탄을 자아낸다. 


<일리아스>의 내용 자체는 워낙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예상과는 달리 트로이 목마가 등장해 트로이가 함락되는 장면까지 나오지는 않는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다툼부터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프리아모스 왕에게 돌려주는 부분까지가 <일리아스>의 분량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리아스>의 주요 내용은 불과 며칠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 전체를 아우르는 듯 느껴지는 것은 호메로스의 이야기 구성 능력 덕분이다. <일리아스>에는 전쟁 전후의 이야기가 매우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마치 전쟁 전체에 대한 대서사시를 읽는듯한 경험을 준다. 여러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전쟁이 일어난 이유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까지 언급하며, 10년의 전쟁을 단 며칠의 이야기에 압축해 놓은 것이다. 


인간적인 신, 신적인 인간


특히 <일리아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과 인간의 관계다. <일리아스> 속 그리스 신들은 다양한 상황에 등장하며 작품 곳곳을 때로는 아름답고 화려하게, 때로는 잔인하고 비장하게 꾸며준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적 측면에서의 역할과는 달리, 신들의 캐릭터 자체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일리아스> 속 신들은 변덕스럽고 잔인하며 유치하고 질투심 많고 다혈질이다. 그 밖에도 현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인간의 추악한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일리아스>의 신들은 인간적이다.  비도덕적이 이기적인 신들이 인간들의 전쟁에 개입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인간들의 운명을 조종한다. 거기에 희생되는 인간들의 모습이 더없이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하나 그런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도 인간 영웅들은 명예롭고 정의롭게 묘사된다. 실제로  트로이 전쟁에 나서는 영웅들은 상대가 적이라도 훌륭한 모습을 보인다면 아낌없이 칭찬하며 명예롭게 서로를 대한다. 또한 <일리아스> 속 인간 영웅들에 대한 감정 묘사는 매우 절제되어 있고 인간 특유의 내적 갈등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영웅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가식과 거짓이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을 '호메로스적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지대로 행동하며 명예와 국가를 위해 비극적인 운명에 맞서 싸우는 전사들은 신들보다 더 신처럼 보인다. 이 호메로스적 인간을 대표하는 영웅이 바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명예와 신념에 따라 거침없이 행동하며 전쟁을 이끌어 간다. 이렇게 호메로스는 현실 속 인간과 신의 특징을 서로에게 투영시켜 작품에 등장시킨 듯하다. 고작 영웅들의 사랑싸움으로 시작된 대전쟁에서, 그리고 인간들의 운명을 쥐락펴락 하는 신들의 손아귀 속에서 희생된 전사들의 명예로운 삶과 죽음을 찬양하고 기리는 노래가 바로 <일리아스>다. 


고대의 인간들은 삶과 죽음, 명예에 대해서 현대인들보다 더욱 깊이 고뇌하고 성찰했을 것이다. 턱 없이도 짧은 수명과 그마저도 쉽게 앗아가는 전쟁들 속에서 당시 인간들은 현대인보다 훨씬 더 죽음과 가까웠을 것이며, 그래서 삶과 죽음,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더욱더 열렬히 고민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 결과, 영웅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평화 속에서 조금 더 사는 것보다 더 명예롭고 가치 있다 생각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길지만 평범한 삶, 짧지만 명예로운 삶 중 후자를 선택해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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