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강소브라가에서 은하수 맛보기
열악한 게르 생활이 계속되어서 그런지 피로감이 조금씩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내가 차 안에서 잠을 꽤 잘 자는 체질이었다는 것이다. 게르에서 깊게 잠을 잘 못 잤더라도 온몸이 흔들리는 비포장 도로 위에서 곧잘 숙면을 취했다. 3일 차 일정은 차강소브라가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목적지까지 차로 이동시간이 길어서 비포장 도로에 차가 덜컹일 때마다 엉덩이가 쑤셨다.
그렇게 자다 깨다 차로 몇 시간을 이동 후 만달고비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의 메뉴는 양고기가 들어간 몽골식 볶음면인 ‘초이왕’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면 기본 반찬부터 이것저것 나오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몽골은 시킨 음식 하나만 딱 나온다. 초이왕이 나오고 처음엔 2인당 한 접시인가 싶었는데 각 한 접시라고 해서 놀랐다. 며칠 지내면서 느낀 것이 몽골 사람들은 식사 양이 상당한 것 같다.
큰 접시에 수북하게 담긴 초이왕을 먹어보았다. 두꺼운 국수 면을 기름에 볶은 것이라 뻑뻑하긴 했지만 밀의 구수한 맛과 양고기 향이 잘 어울려서 내 입맛에 딱이었다. 배만 더 고팠어도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수 있었는데, 끝내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국수가 가끔 생각이 난다. (문득 몽골음식 맛이 그리워져서 서울에 몽골음식 맛집을 찾아두었다. 조만간 방문 예정!) 나는 양고기도 좋아해서 초이왕이 맛있었는데 같이 식사 한 학회 다른 선생님들은 맛이 별로라며 잘 드시질 못했다. 아마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인 듯싶다. 나한텐 아주 맛있었다! 다들 초이왕을 잘 못 드시길래 지부장님께서 피자도 추가 주문을 해주셔서 곁들여 먹었다. 처음 맛본 몽골 피자는 예상을 벗어난 생소한 맛이었다. 초이왕이 짭짤하고 구수한 맛이라면, 몽골식 피자는 담백하고 달달한 맛이어서 대조적이었달까. 나한테는 좀 덜큰한 맛이라 피자는 별로였다.
초이왕부터 피자까지 국물 없이 뻑뻑하고 짠 음식만 먹다 보니 얼음 동동 뜬 아이스커피 수혈이 시급해졌다. 몽골에서는 식사 중 찬물을 주지 않고 뜨거운 차만 나오기 때문에 시원한 커피가 더 간절했다. 식후 아아메를 마셔줘야 싹- 내려가는데... 우리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식당 1층에 있는 커피숍에 내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몽골에서 처음 맛보는 아이스커피였다. 빨대로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목구멍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지는 냉기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가이드 쌤이 밥 먹고 바로 차가운 거 마시면 배탈 난다고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한국인은 ‘식후 아아’ 민족이라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카페에서 우리 옆 테이블에 여학생들이 열심히 스터디를 하고 있었는데, 말소리에 익숙한 내용이 들려 귀를 기울여 보니 한국어 공부 중이었다. 운 좋게도(?) 우리 일행 중 30여 년 경력의 국어 선생님(한국어 교사 자격증도 있으신)이 계셔서 20분 정도 짧게 한국어 특강도 진행하셨다. 우리 특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글 가르치는 것이 일인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몽골에서 한국어 수업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고도 참 재미있는 추억이다. 가이드 쌤이 말하길 몽골 내 한국 노래와 드라마의 유행으로 몽골 학생들이 한국어를 많이 배운다고 한다. 몽골에서 한국어 학원을 열어볼까?
카페에서 한국어 수업과 즐거운 수다를 마치고 근처 마트에 들러 간단한 장을 봤다. 초콜릿과 사탕 같이 차에서 주전부리할만한 간식도 고르고 처음 보는 과일과 몽골 요거트 등 이것저것 담았다. 그러고 나서는 몽골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리는 차가소브라가로 이동했다. 차강소브라가는 높이가 약 40m, 길이가 70km 정도인 엄청난 규모의 암석 지형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본 곳들 중 대자연과 압도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가장 멋있는 곳이었다. 지금도 이곳에서 느낀 감동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차강소브라가는 아주 옛날에 바다였던 곳으로, 하얀 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 천문학회 일행 중 지구과학 선생님이 세 분이나 계신 데다가 그중 한 분은 화석과 같은 지질학 전공이셔서 이곳에 대해 고퀄리티의 밀착 도슨트를 받았다. 지구과학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이곳은 옛날에 해저 지반이었던 퇴적층 지형이 융기되고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침식되고 깎여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듯한 울퉁불퉁한 절벽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망토를 뒤집어쓰고 절벽을 올랐다. 소금기가 희끗희끗한 바위에 걸터앉아서 수백만 년 전 고생대 바다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옛날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황홀했던 대자연과의 조우를 마친 후, 열심히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3일 차의 숙소는 차강소브라가 캠프였다. 세면장에 사람들이 붐비기 전 후다닥 샤워를 한 후 방에 누워서 짧은 휴식을 취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 캠프식으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다 같이 모여서 오늘 마트에서 구입한 각종 과일과 요거트를 먹었다.
과일 종류는 배, 사과, 키위, 망고 등 다양했다. 몽골은 과일도 대부분 수입이라 가격이 꽤 비쌌다. 막내인 내가 과일을 깎았는데, 미니 맥가이버 칼로 사과 껍질이 안 끊어지게 한 큐에 깎기 신공을 보여드렸다! 방에서 다 같이 수다를 떨며 놀다가 바깥 하늘을 살펴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마침내 이틀 내내 우리를 괴롭혔던 비구름이 물러나고 하늘이 열릴 기미가 보였다. 밤 12시 정도가 되자 날씨가 개고 은하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제 하늘이 닫힐 줄 모르니, 인천에서부터 고이 모셔온 트래블돕과 각종 촬영 장비를 서둘러 꺼냈다. 하지만 속상하게도 트래블돕 나무 밑판 한쪽이 떨어져 있어서 관측은 하지 못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 학회에서 수백만 원을 들여 휴대용(기내용) 망원경을 제작하고, 인천에서부터 고이 모셔온 장비였는데... 아마도 짐을 옮기고 차에 싣는 과정에서 부품에 충격이 갔던 것 같다.
망가진 돕소니언을 보니 저녁식사 때 건너편 테이블에 있던 한 한국인 남자 무리가 떠올랐다. 지구과학 남교사 모임으로 열흘 간 몽골 답사 중이라며, 망원경도 챙겨 왔다고 하던데... 그분들 게르를 수소문해서 장비를 빌려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렇게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셋째 날은 안시(맨눈)와 카메라를 이용하여 관측을 했다. 아래는 그 결과물이다.
하늘은 두어 시간 정도 열렸다가 이내 구름이 몰려와 관측을 마무리했다. 은하수는 딱 아쉬울 만큼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아쉬움을 뒤로 한채 삼각대와 카메라 장비를 철수하고, 방에 들어간 순간 게르 벽에 무엇인가가 붙어있었다. 저게 뭐지 싶어서 가까이 가보니 내 손가락 만한 전갈이 붙어있는 게 아닌가? 급하게 사진을 찍어 검색을 해보니 독이 있는 전갈이었다. 아뿔싸...
몽골 사막에 전갈은 흔히 있는 것이라지만, 내 침대 옆이라니! 아무래도 알면서 자기는 힘들 것 같아 옆에 선생님네 숙소로 이동해서 쪽잠을 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배탈이 나서 아닌 밤중에 고생을 했다. 장이 꼬이는 복통에 하늘이 노래지고 아까 미처 못 본 별이 다 보였다. 알고 보니 나 포함 다른 선생님도 이 날 같은 시간에 배가 아프셨다고 하셨다. 다들 한 번씩은 겪는다던데, 3일 차 새벽에 치른 몽골 신고식(?)인 셈이다. 이렇게 배탈과 함께 다사다난한 3일 차는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