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007 시리즈를 보면 항상 그렇다. 멋진 용모의 주인공은 악당들과 대적하면서 그가 내갈기는 총엔 결코 총탄이 소진되는 일이 없다. 최악의 위기상황에서도 언제나 임무를 완수하고는 미녀와 함께 유유히 현장을 떠난다. 심지어는 현실에서도 숀 코너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다니엘 크레이그 하듯이, 그는 사라지지 않고 대를 잇는다.
만일 그가 영화 제작 중간에 사망하고 본래 예상했던 시나리오에서 벗어난다면 현실에서는 격렬한 항의가 뒤따를 것이다. 결국 그는 죽어서도 되살아나며, 그것을 초월해 영원의 삶을 영위하는 절대자같은 존재가 된다.
'007 Never die'나 'Die hard'나 실상은 같은 내용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이처럼 세계를 구출하거나 보호하는 역할로 치장한 지배 세력은 끊질긴 변모로 그 생명을 지속한다. 심지어 주인공이 가슴졸이는 상황에 직면했을 땐, 오금을 저리는 긴장과 함께 위기 탈출에서의 박진감에 우레같은 지지를 받는다.
자본적 삶도 이같은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체없는 기관'이다. 무엇이 거기에 달라붙든, 유동적 신체는 개의치 않는다.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 등 새로운 숙주에 옮겨 붙으면 새로운 영양분을 흡수하며 목숨을 이어간다. 그러면서 자신은 세상을 빈곤, 공포, 폭력 따위의 사회적 악에서 구출하고 보호한다는 무의식을 형성한다.
우리가 그 세계에 사는 이상, 사실은 그 보다는 다르다는 걸 징징거려 봐야 별 소용없는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타협이나 약속이 빈번히 꺠뜨려진다면, 그 영화는 오직 주인공만을 위해 상영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때 '람보'같은 영화는 그 같이 거대한 주도자의 영광을 찬양하는 영웅주의적 활동 사진이 아니었는가?
하지만, 현상을 어찌할 수 없는 운명론처럼 무의식화하더라도, 이것에 균열을 내고 도대체 자신이 주인공 주변에서 무얼 하고 있는 지 깨닫는 것이, 최소한이라도 자기 혁명을 일으키는 작은 소음이라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