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술관에 전시됐던 '구겨진 맥주캔' 작품이 쓰레기로 오인돼 버려졌다가 폐기 직전 회수됐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 소도시 리세에 있는 LAM 미술관에서 일하던 한 정비공은 미술관 엘리베이터 안에 찌그러진 맥주캔 두 개가 놓인 것을 보고 쓰레기라고 생각해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렸다.
그러나 맥주캔은 사실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라베가 선보인 작품이었다". [연합뉴스 10.8]
정비공은 예술이라는 것에 반감을 갖고 반달리즘처럼 그 작품을 훼손하려 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의도든, 자신이 관리하는 구역에 무단히 버려진 것처럼 보이니, 행위자의 도덕성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처리했을 것이다.
과연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추함을 피하고 사람들에게 정신적 쾌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뒤집으면 추함속에서도 미를 엿볼 수는 있다. 더구나 작가의 의도가 시선과 문자에 매몰되어 있는 서구 이성주의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면 사태는 다르다. 그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버려진 쓰레기를 엘리베이터에 탑재함으로써 무용하고 추함의 분류를 다른 시각에 할당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비공 입장에서는 한낱 지장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것이 유명 작가의 작품이라는 문자가 붙는 순간, 그것은 예술작품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 순간 정비공이 한 행위는 그만 몰상식으로 전화했다. 여기서 어쩌면 작가는 그런 것조차 이미 계산에 포함했는 지도 모른다. 미와 추함의 경계는 한순간에 변화하고 작품은 폐기물이 되는 전복을 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거기엔 누가 일일이 그런 의도가 있었음을 고지한 경우에만 예술작품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일까? 거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이 말하지 않은 것은 사람의 시각에 따라 취급이 달라진다. 거기엔 말하지 않고 목소리에 잠겨 있는 것을 억압함으로써 그 작품은 예술이 아닌, 분리수거의 대상이 될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찾아 예술이라고 미를 추구한다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타인이 공명하는 울림이 없다. 물론 그것은 삭제되거나 생략된 것이다. 그런데 일순간 그것을 통해 뒤늦게 예술작품이라는 말이 덧붙을 때는 시선과 말이 달라진다.
여기서 작가는 정비공을 끌어들여 이 희극적인 작업을 완성해 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완성한 작가는 오히려 정비공인 것이다. 그는 쓸모없는 것에서 미를 가려내는 예솔가인 것이다! 이 의도 없는 개입은 시선과 목소리에서 생략된 실재를 소환한 것이다. 작가가 계획했던 어쨌든, 말과 시선에서 누락된 실재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예술이라는 것이 굳이 자연의 숭고함, 인간사의 장엄함을 들춰내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명칭과 시각을 동원하더라도 다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추구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찌그러진 깡통을 수거해 버린 것은 전복이 아니라 미 그 자체를 함의한 것이리라. 더욱이 미 그 자체는 어떤 완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공백을 남기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