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늙음을 위한 비움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며
진리를 실천하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 오관게
봄을 알리는 벚꽃이 흐드러져 세상이 하얀 솜사탕을 발라놓은듯 하더니 어느 틈엔지 오색의 연등이 길거리를 장식하며 명실상부한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앉았다. 버스를 타고 화요일마다 지나는 종로길, 바람에 줄지어 흔들리는 연등이 거리 전체를 한 지붕 한 가족으로 이어준 듯해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삼 년 전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일을 잠시 쉬고 동네 책방에서 사찰음식 요리책을 보던 중 '평소 섭취하는 음식을 약으로 생각하고 질병 치료를 위해 쓰는 약과 그 근본은 동일하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후 수시로 사찰음식의 정보와 소식들을 찾아보며 즐기는 일상이 내 사소한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그런 인연이어서인지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어지고, 좀 더 나아가서는 사찰음식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리저리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주춤거리고 고민하던 내 모습에 딸이 수업 등록까지 마치고 전문가 자격증을 딸 때까지 아낌없는 투자와 성원을 보내주겠다며 내 든든한 뒷배를 자처했다. 그렇게 시작된 '향적세계' 수업으로 세 분의 스님과 함께 초, 중, 고급을 지나 자격증까지 취득할 수 있었다. 내 나이 육십을 바라볼 때였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는 날이 갈수록 힘이 들어하고 느림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 반면 나에게는 마음이라는 애도 있는데 걘 아직도 정신연령이 철부지라 몸뚱이의 사정을 봐줄 생각은 별로 없다. 그나마 사찰음식을 하며 내 몸뚱이와 마음은 서로 화합할 줄도 알게 되고 천천히 기다려주는 법도 배웠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다 어른이 된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태어나 커가면서 매일매일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날들을 누구나 다 새롭게 살고 있는데 나이를 먹었다고 밝아오는 아침이 경험을 해서 익숙한 아침은 아니다. 육십 대의 아침이나 이십 대의 아침은 다 똑같이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어도 난생 처음 겪는 일들에 실수도 하고 좌절도 한다.
사찰음식 수업 어느 날 연잎밥 만드는 법을 배웠다. 들어가는 재료가 고작 찹쌀, 연자, 대추, 밤 연근이었다. "스님. 시중에 파는 연잎밥은 열 가지도 넘는 재료가 들어가 먹을 때 씹는 맛도 좋고 보기도 화려한데, 정작 스님들이 드시는 연잎밥은 참 소박하네요. 호호호." 어느 수강생이 질문했다. 나도 묻고 싶은 내용이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성을 갖고 태어나는데, 살아가면서 나쁜 습관이 하나씩 늘어나 점점 더 부처님이 되는 길이 멀어진다 하셨다. 본래의 나를 찾고자 한다면 가지고 있는 나쁜 습(習)을 한 꺼풀씩 벗기듯 요리에서도 재료 본연의 맛을 찾고자 해야지, 다른 재료를 더하면 본연의 맛은 없어지고 뭔지 모르는 덩어리만 남는다 하셨다. 사찰음식은 소박하면서 영양에 과잉이 없어야 하며 그렇게 올바른 식사를 하면 병들지 않는다고도 하셨다.
연잎밥 하나에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버린 순간이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반은 넘게 버려야 했다.
지나가면서 한 번씩 던지는 딸의 짜증 내는 소리에 상처받고 담아두지 말아야 한다.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에 우울해 하지 말아야 한다.
갑자기 팔과 다리에 힘이 빠져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아야 한다.
젊었을 때 나를 그리워 말아야 한다.
세어보니 이보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번뇌와 망상을 안고 늙어가고 있었다. 문득 학창 시절 외우던 정철의 시조가 스쳐간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어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가슴이 먹먹해지고 숙연해지는 글귀들이다. 시험 범위라 의미 없이 주절거리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
상도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더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내가 있을 것이다. 더 기운 없는 모습으로 더 늙은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내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야 한다.
삶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길지도 짧지도 않다. 사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후회가 없었는지, 나이를 먹어감에도 자신에게 얼마나 당당했는지가 중요하다. 삶을 시간적 시선으로 보지 말고 공간적 시선으로 봐야 한다. 좀 더 풍요롭게 자신의 삶을 채우기도 하고 비우기도 하며, 자신만의 늙음을 만들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삶이라 생각한다. 노사연의 노래 가사처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찰음식에서 배운 삶의 지혜가 더 나은 늙음을 위해 불교대학으로 진학하는 동기로 이어졌다. 점점 더 발전하고 진화하는 60대를 살아보려 하는 자신을 칭찬하며,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