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육아
너는 나의 "브레이크"가 아닌 "엔진"이야.
"요가강사. 필라테스 강사. 트레이너. 비키니선수, 피트니스대회 심사위원."
출산 하루 전날까지의 나는 이렇게 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남들 놀 때 공부하고, 열정페이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내 또래 중에서.. 아니 비슷한 분야의 여성들 중에서 나는 감히 내가 선두에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했으며, 보람을 느꼈고
커리어가 쌓일수록 경제적 능력과 대우 또한 좋아지니
만족하는 삶을 살아왔다.
결혼하고, 아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과
"이미 넌 노산이야. 늦어지기 전에 얼른 가져라 "
시부모님이 주는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그래. 어차피 한 명은 낳을 생각이었으니까.'
첫아이를 계획하자마자 순조롭게 임신했다.
임신도 쉽게 되었고, 조심해야 한다는 초기임신기간에도
입덧 한번 없이 평화로웠다. 오히려 장점이 많았다.
운동과 건강을 지도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몸매관리가 되어 있었어야 했는데, 임산부이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어도, 배가 나와도,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반대로 주변 어르신들은
"임산부" 이기 때문에 일을 쉬어야 한다고
일을 사랑하는 나에게 잘근잘근 스트레스를 주기 일쑤였는데 나는 그 말에 반박했고( 이것 역시 임산부이기 때문에 호르몬의 변화로 예민하다는 핑계로 큰소리쳤다.)
"어머 아버님. 해외에 운동하는 여자들은 만삭의 몸으로도 자기 체중의 두 배인 무게로 스쾃도 하더라고요. 저,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체력 좋은 거 아시죠? 그리고 저 찾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요~ "
결국 임신 초기부터 중기..
22킬로가 증가한 만삭의 몸으로도 나는 수업을 놓지 않았고
나의 체력을 과신했다.
여전히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업과 강의를 다녀도 거뜬했다.
"선생님. 막달에는 제발 좀 쉬세요"
배가 불러오면서 몸짓이 조금 둔하게 느껴졌는지
주변의 권유와 남편, 양가 부모님들의 걱정들로 나는 내 선에서 최대한 타협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스스로 정했고
출산예정일 한 달을 앞두고 마지막수업을 마무리했다.
'사실.. 난 더 할 수 있었어!!
난 그들과 싸우기 싫어 타협한 것뿐이야.'
나의 솔직한 속내였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바로 그다음 날.
나는 가진통을 느꼈고
이상한 낌새를 느껴 , 당시 다니던 산부인과를 갔더니...
이런.
"이미 자궁문이 4cm 벌어져있어요. 아니, 안 아프셨어요?"
어이없단 표정으로 나를 보시던 담당의사 선생님.
최대한 자궁문이 더 열리지 않도록 늦춰보자 하셨지만
5cm.. 6cm..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었고.
큰 병원으로 급히 옮겨져
아이는 33주 만에 1.69 kg로 출산했다.
분만실에 들어가서 자연분만으로 20분 만에 아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출산 전 의사 선생님께서 나에게 거듭 권고하셨다.
이 주수의 아이들은 자연분만보다는 제왕절개를 권유한다고.
산모와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운동하는 여자" 로써, 운동을 지도하는 직업인으로서, 약간의 오기와 자존심이 있었다.
남들보다 더 강한 내 골반과 하체 힘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의사의 거듭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 무통주사 없이 출산의 과정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요! "
의사는 마지못해 그럼 만약 문제가 생겨도 저희는 책임 안 집니다.라는 마지막 협박과 함께 동의서에 작성하고
분만실로 들어가자마자 별로 길지 않던 20분..
아이가 내 몸속에서 나오는 느낌과 최대로 힘을 주었을 때...
" 스쾃 최대중량 치는 느낌하고 비슷한데?"
하지만
내가 느낀 최대중량스쾃의 느낌과는 너무나 대비되던
작디작은 아기...
아들은 너무나 작았다.
아기의 폐가 완성될 무렵의 33주에 출산했던 탓에..
나는 내 품에 아들을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다리 벌린 채로 누워 아들이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지는 뒷모습.... 수술실 초록색 강보에 싸인 작고 동그란 것만 바라보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까 분만실에서의 20분보다
훨씬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시계만 보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흐르긴 하는 걸까.
요가에서는 Tapas (고행)라는 고대수련법이 있다.
말 그대로 고행을 찾아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세우고
버티고 인내하는 수련이다.
요가강사로, 제자들을 지도하고 양성하는 지도자로 십수 년을 몸담았지만...
나는 그날 처음으로 Tapas를 , 인지했다.
내 아들의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하고
산모실에 격리되어 있던 지옥 같던 시간들.
당시에는 코로나가 심각할 때라 남편과의 동실도 불가해서
오롯이 나 혼자만의 암흑 공간이었다.
정적을 깨는 노크소리와 함께....
"저체중인 건 외에는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합니다.
하지만 규정상 아기체중이 2kg가 넘어야 퇴원할 수 있어요.
산모님은 자연분만인 데다 건강에 이상이 없으시니 죄송하지만 오늘 퇴원해주셔야 합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람.
내 아들을 두고, 나 혼자 가야 한다고?
원래 이런 거야?
아이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소식에 안도했지만
당장 떨어져야 한다는 말에 눈앞이 캄캄했다.
제왕절개를 했다면 며칠 더 아이 근처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
나는 너와 만나는 첫 순간부터
나의 고집과 아집으로 나를 내려놓지 못했구나..
너를 외롭게 했구나..
평가지가 있다면, 엄마로서 첫 감점을 받는 것 같았다.
산후조리원에서 나는 아이 없이 혼자 입실한 유일한 산모였고, 소위말하는 조리원 동기인 조동은 무슨.
산후조리원의 엄마들, 아기들 얼굴을 보기 싫어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독방에서 내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2시간마다 알람 맞춰놓고 모유를 짜내는 일이었다.
다른 엄마들이 자기 아기에게 주는
순도 100의 사랑과 행복의 모유가 아닌...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담긴 모유였다.
병에 담은 모유를 전달할 때만 아들을 볼 수 있었고
첫 모유를 가지고 면회 간 날....
나는 그리 크지 않은 손인데,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아들의 얼굴을 보니 이전의 "나"라는 존재가 방어할 틈새도 없이 우르르.... 처참하게 무너졌다.
아들에게 처음 보여준 엄마의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된 "못생김" 그 자체라니......
그 콧대 높고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던 커리어우먼은
온데간데없다.
매번 모유를 전달하고 나 홀로 병원을 나오는 길..
정확히 22일을 그렇게 일과를 보냈다.
다른 엄마들이 산후다이어트를 얘기하고 고민할 때..
나는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임신 전 체중으로 빠르게 돌아왔지만 병원을 오고 가는 발걸음은 가면 갈수록 이렇게 무겁고 뼈마디가 쑤실 수가 있나 싶었다.
" 복부비만.. 하체 비만 회원님들이 주로 무릎.. 발목.. 내가 지금 통증을 느끼는 이 부분이 아픈 건데.."
이 순간에도 직업병이냐... 하면서도
여태 괜찮았던 산후통이 이제야 오는 건가, 싶었다.
통증은 신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거구나..
나는 내 아들을 기다리는 하루하루..
나에 대해 깨닫고
다듬고 인정하고 또.. 갈수록 온전히 고립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엄마의 것을 놓지 못해.. 너를 이렇게 처음부터 힘들게 했구나.
Karma... 카르마... 업보다.
카르마는
요가이론에서 나를 찾고 이해하는 과정 속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련이다.
나는 나라는 사람이 엄마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지했고 그렇게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이전의 나와 작별하는 연습을.
"수련"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