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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쌤 May 12. 2024

이번 생엔 교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꿈을 먹고 자라서 꿈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넌 꿈이 뭐야?”

난 꿈이 명확한 어린이였다. 미술도, 체육도, 노래 부르기도 좋아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또한 행복해하던 나는 유치원 교사를 꿈꾸게 되었다.


나에겐 5살 차이가 나는 어린 사촌 동생들이 있다.  명절이나 주말에는 자주 할머니 댁에 갔었는데 동생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기다렸었다. 마당에 서서 "얘들아 나왔어!"라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문을 열고 "누나!", "언니!" 하며 쪼르르 마중을 나와주었다. 할머니네는 시골이라 티비도 잘 안나오고 인터넷도 잘 안되는 그런 곳이었다. 밖으로 나가 놀고 이야기 꽃을 피우기 딱 좋은 환경이라 할머니 댁에 가면 종종 뒷마당을 넘어 두덕을 따라 걸어가면 있는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유년시절을 보냈었다. 이렇기에 항상 할머니 댁에 가면 동생들은 "오늘은 뭐 하고 놀까?"라고 물어보았고 나는 가끔 꼬마선생님이 되어 학교에서 배운 것을 알려주었다. 한 번은 단풍나무 열매로 프로펠러 날리는 걸 배운 적이 있었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 할머니댁 단풍나무 열매란 열매는 다 따서 날리며 논 적이 있었다. 이때 하늘에 날아가던 헬리콥터를 손으로 가리키며 헬리콥터가 어떻게 날아가는 건지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동생들은 “헬리콥터는 두두두 날아가지 누나.” , “언니 헬리콥터는 날개가 있어.”라고 저마다 대답을 해주었다. 우리가 날리는 부메랑 같기도 하고 헬리콥터 같기도 하지 않냐며 저렇게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 꼬마 선생님처럼, 때로는 꼬마 과학자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얘들아 헬리콥터는 단풍잎을 보고 만든 거래.”라고 이야기해 주자 헬리콥터를 볼 때마다 “단풍나무!”를 외치기 시작했다. 헤어질 때 단풍나무 열매를 주머니 가득 넣어가던 모습을 보고 어른들은 못말린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시곤 “동생들이 수수가 알려준건 곧 잘 기억하고 좋아해. 우리 수수는 커서 선생님 하면 정말 잘하겠어"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나의 담임 선생님은 몽땅 분필이 생기면 "서기, 분필 정리해라"라고 말씀하시며 버리셨다. 당시 서기였던 나는 그걸 모아서 주차장 바닥을 칠판 삼아 아파트 동생들에게 수업을 했었다.


그 뒤로 옆 동 사는 아저씨는 막둥이를 날마다 데리고 나와 내 손에 요구르트를 쥐어주며 오늘도 잘 부탁한다고 하셨고 2층 사는 동수(가명)는 “누나~”라고 부르며 나를 따라나섰다. 동수는 나를 영웅처럼 바라보았고 “우리 아파트 재미있는 누나"라고 소개하며 사람들을 모아 왔다. 학교에서 “네 잎클로버"노래를 배우고 아파트 동생들과 네 잎클로버를 열심히 찾아나섰다. 열심히 찾은 네 잎클로버를 하나씩 들고 율동을 만들어 춤을 췄다. 한동안 우리 아파트 곳곳에서 네 잎클로버 동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재미있어 보였는지 점점 많은 동생들이 따르기 시작했고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나는 동네 꼬마들을 이끄는 어린이가 되었다.

어느 날은 내가 엄청 귀여워하던 옆 동 사는 동생 가영(가명)이를 울린 적이 있다. 그때 당시 학교에서 안전교육을 했었는데 이슈가 “묻지 마 유괴"였다. 뉴스에서도 아이들을 유괴하여 먼 지역에 유기하고 오는 사례들이나 돈으로 협박하는 게 큰 화두가 되자 선생님께서는 안전교육으로 다뤄주신 것 같다.

나는  주제로 가영이에게 “가영아, 언니는 이제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으로 변신할 거야. 우리 소꿉놀이 해보자.”라고 하니 해맑게 가영이는 “응! 좋아”라고 대답했었다.

“어머~ 너 귀엽게 생겼다 이름이 뭐니?”라고 묻자 가영이는 “전 가영이에요.”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저기 구름동사는 아줌만데 과자하나 사줄까? 아줌마 따라올래?”라고 하자 “네, 좋아요"하며 순순히 따라오는 것이었다.

당시 아파트 입구에는 공동현관문이 있었는데 나는 우리 동 공동현관문을 열어주며 “자, 이리 들어와 아줌마가 과자 사줄게”라고 하고 투명한 공동현관문 안에 가영이를 들여보낸 뒤 바로 앞에서 가영이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선 “가영아, 다른 사람이 따라오라고 해서 함부로 따라가면 어떡해. 이렇게 문 안에 갇힐 수도 있단 말이야. 지금은 문이지만 엄마, 아빠랑 헤어질 수도 있어! ”했더니 가영이가 엉엉 울면서 “언니. 엄마랑 헤어지는 건 무서워. 과자 사준다고 해서 따라간 거란 말이야.”라고 하며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가영이는 과자 사준다는 어른이나 아줌마가 요구르트 줄 테니 따라오라는 이야기에 함부로 따라가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가영이는 아저씨께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제는 이사를 와서 가영이의 소식은 들을 수 없지만 야무지고 귀여웠던 만큼 지금도 잘 지내고 있을 것 같다.


동생들과의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지냈던 나의 유년 시절 함께 놀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분리수거장에 버려 나무판을 주워와 미니 칠판을 만들었을 때, 할머니 댁에 가서 동생들을 데리고 선생님처럼 수업했던 이야기, 우리 아파트의 피리 부는 어린이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내 꿈은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꿈이 명확했던 나는 부모님께 유치원 교사가 되는 방법을 물어봤다.

당시 부모님은 유치원 교사가 되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셨고 컴퓨터로 찾아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

무엇이든 스스로 찾으라고 하는 부모님 밑에서 나는 공립 유치원 교사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병설 유치원 교사”로서의 꿈을 키웠다.


“수수야, 수수는 왜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어?”


선생님의 물음이었다. 난 어렸을 때 미술학원 유치부에 다녔다.

그 당시 난 카라반이었다. 카라반 이름이 어려워 카레반이라고 부르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엄청 젊으셨고 나를 예뻐해 주셨다. 도넛을 교실에서 같이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동그란 도넛만들기였는데 길쭉한 도넛을 만들고 싶어하던 내게 "와, 길쭉한 도넛도 재밌겠다. 선생님은 동그란 도넛만 생각했는데 좋은 생각이야. 정답은 없어 수수야. 어떤 모양을 만들든 근사할거야. 기대된다 " 라고 하셨다. 어떤 시도든 받아들이시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볼 수 있도록 지원해주셨던  행복하고 설레던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항상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선생님이 안나오신적이 있는데 무서운 사과반 선생님께서 시계를 잘 못 본다며 “한숨 쉬면서 너무 답답해!”라고 하셨던 기억도 난다.


선생님께 일화를 말씀드리며 “여러 가지 기억이 가득했던 저처럼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저는 무서운 선생님보다는 재미있고 모르는 걸 차근차근 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을 거라며 나중에 선생님이 근무하는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었다.


“꿈만 꾼다고 이룰 수 없어. 직접 해보고 싶어!”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부모님은 그런 내게 봉사활동은 어떤지 권유해 주셨다. 찾아보니 중학생이 되면 어린이집에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수업이 끝나면 일주일에 1번 인근 시립어린이집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대부분 청소를 시키셨지만 가끔 아이들을 만나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수업하는 모습도 보게 되었다. 영아기 아이들에게는 토닥거리거나 분유를 먹이는 모습, 유아기 어린이들에게는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당시 어린이집 선생님께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되면 신생아들도 봐주어야 하나요?”


선생님께서는 내게 웃으며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같으면서도 다르단다. 어린이집은 신생아도 포함하여 돌봄을 하게 되지. 물론 5살부터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한단다. 선생님은 영아를 돌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어린이집 교사가 되었어.”

이 얘기를 듣고 나는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직업과 유치원 교사의 역할이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봉사를 하지 않았으면 잘 몰랐을 개념이었다.

그렇게 나는 교육만 하고 싶었기에 유치원 교사의 길로 쭉 나아가기로 했다.


“넌 꿈이 뭐야?”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유치원 교사!”


조각조각 든 나의 기억처럼 아이들 또한 나와의 추억 한 조각이 마음속에 남을까 싶어 항상 즐겁고 행복한 기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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