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8월,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플로리다 인터내셔널 유니버시티(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2년의 호스피탈리티 매니지먼트(Hospitality Management) 석사과정을 위해서였다. 막 태평양을 건너온 나에게 이 아름다운 해안도시는 낯선 타향이었다. 나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돛단배였다. 한국 학생들은 많았는데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집으로 쉽게 전화도 할 수 없었다. 한국어가 영어로 바뀌어 나오는 내 말은 종종 통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도 나는 가끔 이해 못 하고 헤매었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영어가이드로 일 했었기 때문에 더욱더 당황했다. “이러다간 졸업도 못하겠다”라고 비관하며 움츠러들었다. 서투른 영어에 문제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고쳐야 했다. 그리고 친구를 사귀었다. 자신 있게 영어로 수다를 떨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싶었다. 몇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찐한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콩글리쉬(Korean English)를 했다. 영어 어휘력은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머릿속으로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데 시간이 걸려, 대화를 그만둔 적이 많았다. 내가 하는 영어에는 발음, 인토네이션, 듣기가 큰 문제들로 나타났다. 그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라는 응답은 정말 싫었다. 또는 “넌 말이 안 돼”라고 하며 보인 그들의 냉정한 표정은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좌절감을 느꼈다. 어떻게 해서든, 영어를 능숙하게 하고 졸업을 해서 자부심을 만회하고 싶었다.
발음이 뒤섞여 나왔다. 예를 들어, F나 Ph 가 P로 표현되고, R이 L로, Th가 S로, V가 B로 바뀌어 나와 사전에도 없는 말이 되기 십상이었다. 냉장고(refrigerator)는 최악의 원수였다. R로 시작해서 중간에 두 개의 R을 거치고 마지막에 R로 끝난다. 혀를 4번 옴폭하게 말으면서 발음해야 했다. 거기다가, 중간에 악센트를 넣으며 F를 발음하기 위해 윗니로 아랫입술 반을 살짝 쓸어야 했다. 5음절, ri-FRIJ-uh-rey-ter, 로 구성된 이 단어를 제대로 소리 내지 못해, 몇 달간 큰 냉장고를 쓰지 않고, 작고 간단한 프리지(fridge)를 대신 썼다. 매일, 각각의 스펠링에 맞는 발음을 암기했다. 거울을 보고 입술, 혀, 이를 어떻게, 어디에 위치하고 발음해야 되는지를 이해하고 몇 시간씩 연습했다. 혀는 얼얼해졌다. 입술은 부르텄다. 마음은 빠른 성과를 원했다. 그러나, 명확한 발음이 머리에 각인되고 입에 배어서 나오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대화할 때는 그들의 입을 주시하려 노력했다. 입을 얼마만큼 벌리는지, 윗니는 어디를 터치하는지, 혀는 얼마만큼 꼬부라지고 또는 이빨 사이로 나오는지를 확인했다. 그들의 말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모방하면서, 발음은 개선되었고 어휘수도 늘어났다.
다음으로, 인토네이션과 억양도 어려웠다. 높낮이가 없이 나오는 영어에 그들은 지루해했다. 강조하고 싶은 단어에 힘을 주면서, 연극을 하듯 연습했다. 억양이 맞지 않은 내 말에 그들은 “너는 악센트가 심하다”라고 했다. 그 말에 "코리아에서 온 내게 악센트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라고 대꾸했지만, 표준영어를 따르기 위해 신경을 썼다. 여기서, 악센트는 사투리 같은 영어를 뜻했다. 그들이 자주 쓰는 단어와 문장을 흉내 내기를 되풀이했다. 그래도, 내가 가진 악센트는 좀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일단, ‘그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된다.’로 잡았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었다. 클래스메이트 제니에게 말을 걸었다. 제니는 호의적이었다.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제니의 말은 머리 위로 날아갔다. 나는 못 알아들어 대답을 못하고 웃기만 한 적도 있었다. “다시 말해 달라”는 내 부탁에, 제니는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천천히 반복해 주었다.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발음을 고쳐 주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나의 영어 향상을 많이 도왔다. 우리는 가까워졌고 여러 수업을 같이 수강했다. 강의를 녹음해서 여러 번 들었다. 모르는 단어는 따로 정리해서 암기했다. 그 끈기를 가지고 지식을 얻었고 시험에 대비했다. 한 학기가 끝난 뒤, 좀 더 재미있게 영어를 늘리기 위해 TV를 샀다. 드라마를 보면서 때에 따른 대화를 적고 달달 외워서 룸메이트 마라 한테 써먹었다. 마라는 나를 따라 곧 ’ 풀 하우스’와 ‘사인펠드’를 같이 즐겼다. 나는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되풀이해서 보았다. 때때로, 마라와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숨은 의미, 풍자, 아이러니에 대해 토론을 했다. 잦은 대화로 우리는 가까워졌고 영어는 조금씩 좋아졌다. 친구들과 여러 가지에 대해 얘기했던 것이 영어를 잘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제니를 마라에게 소개했고 우리 세명은 곧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같이 밥을 해 먹고 TV를 봤다.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말에는 바다로 가거나 영화를 보았다. 추수감사절에는 마라의 부모님을 방문했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같이 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3 총사라 불렀다. 넓은 바다에 홀로 떠 있었던 나의 돛단배는 드디어 마이애미 비치에 닻을 내렸다. 다행히, 좋은 친구들을 만나 외로움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나의 유학 생활을 지탱해 주는 대들보였다. 제니와 마라는 일상생활에서 또 수업에서 나와 더불어 했다. 숙제와 프로젝트를 같이 하며 우리는 서로를 지지했다. 프로젝트 발표를 하기 전, 각자의 연습을 경청했고,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었다. 귀를 기울여 준 그들 덕분에, 매번 마다 나의 발표력은 진전되었다. 소심성은 작아졌고 적극성은 커져 갔다.
2년의 석사과정을 끝마칠 즈음 나의 영어는 많이 나아졌다. 자존감을 되찾았고 자신감이 자랐다. 계획한 대로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마이애미에 첫발을 디딘 후, ‘새로 시작하는 거다’라는 진취성을 가지고 임했다. 그러나 곧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내가 쓰는 언어를 진단하고 필요한 치료법을 찾아야 했다.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친구들과의 대화라는 두 가지 약이 필수였다. 표준영어를 하기 위해 모방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영어로 막힘없이 소통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힘썼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가 잘하는지 못 하는지를 지적해 준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 두 명과 수다를 떨고, 공부를 하고, 많은 것을 같이 하면서 찐한 우정을 쌓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그 둘은 생활 영어를 다양하게 해 주었고, 학업 영어를 깊게 해 주었다. 나의 성장을 돕고 유학생활을 풍부하게 해 준 두 친구가 있었다는 것에 매우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