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렉커들과 무심한 영상 소비자의 공모
최성봉,
팝페라가수.
3살에 버림받아 고아원에 있다가 5살부터 밤의 세계와 연계된 곳에서 스스로 생계를 이어갔다던 기구한 삶의 주인공.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알려진,
살아온 이력이 너무나도 진해서
내 기억에 똬리를 틀었었다.
"아, 세상에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보낸 이도 있구나!"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2년 여전,
한 영상크리에이터가
가짜 투병을 빌미로 한 그의 행각을 연속해서
파헤치더니,
얼마 뒤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음을 전하면서 멈췄다.
'무조건 살아, 단 한 번의 삶이니까'라는
책을 내면서까지
기구한 생을 버텨온 스스로에게 응원을 보태던 그는
무던히도 자신을 곧추세우느라 애쓰는 듯했다.
그럼에도
33살,
채 피어내지 못한 미완의 생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말,
"버틸 때까지 버텼다."
...
참 먹먹한 인생행로다.
우리는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보장과 배려에 공감한다. 문득 이는 신체적 장애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동물도 새끼를 낳으면 한동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 후 독립시킨다.
하물며 사람임 이랴!
그런데 제대로 된 양육환경이 아닌 곳에서 성장하여, 몸만 성인이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영유아기에 제대로 된 양육과 정서적 교유를 경험하지 못하면,
이후의 삶에서 여러 심리적 부적응이 나타날 수도 있음은 익히 배워온 바다.
긍정적 자아상, 바른 윤리관과 가치관의 hierarchy 정립, 바람직한 사회성 형성 등은 학교교육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터이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혼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온 사람이,
세상 풍파에 맞서며,
자신을 올곧게 지켜낸다는것은
난파선으로 대양의 항해를 완수하는것 만큼의 어려움이었을지 모른다.
요즘 부쩍 '묻지마 범죄'가 늘고 있다.
개인적 분노와 불만을 불특정대상에게 표출하는 이런 현상의 배경엔 사회적 박탈감이라는 병리적 원인이 자리함을 짐작할수 있다.
신체적 장애인뿐만이 아니라
양육결손 환경에서 자란
'겉만 어른들'의 심리적 미숙상태에 대한
사회적 이해 확대가 더 필요한 시대에 봉착했다고 생각된다.
다른 측면으로는
유명인,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사적 영역을 가십성 콘텐츠 영상으로 제작하여
온라인에 올림으로써
수익 창출을 노리는 사이버렉카들이 늘고 있다.
그들의 몰염치함을 성공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게 문제다.
무심코 소비한 이 영상물은
거대한 집단적 동일 가치로 주입되어,
때론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광기로 작동한다.
온 라인 상에서
지나치게 노출되고 폄하되면서,
꽃다운 청춘들이,
고귀한 삶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가는 작금의 세태를 보며,
우리가 알 권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행여,
국민의 집단적 관음증이라는 전염병을
'알 권리'라고 합리화하는 건 아닐지.
동시대인이란 관계성은,
남의 아픔과
내 아픔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필연적 연대로 귀결한다.
장애를 배려하며,
더러는 묻어주고,
때로는 손잡아 일으켜가며
함께 보듬고 살아가는 것만이
'묻지 마 범죄'를 막아내는 최선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