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초짜의 영화 감상기록
가족 여행을 마치고,
호주 브리즈번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대한항공 여객기 안에서 보게 되었다. (2024.10.26)
이 영화를 고른 건 앤 해서웨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 말고도 각 배우들이 맡은 캐릭터가 보여주는 묘한 마력이 있어서 장면 장면마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특히 스티븐 로뎀 역의 딩클리지가 그랬고, 카트리나 역의 마리사 토메이도 그랬다.
보는 중에는 '이거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나' 싶었는데, 절정-결말로 넘어가면서 흐트러진 실타래를 하나로 묶어 갈등을 해결하고 해피엔딩을 만들어 주는 감독의 솜씨가 대단하여 감탄했다.
끝을 보고 나서도 묘한 감정이 들어서 자꾸 곱씹어 보게 된다.
평양냉면 먹을 때 이게 무슨 맛인가 싶었다가 나중에 자꾸 생각나는 것처럼,
'이게 무슨 맛이지? 평범한 해피 엔딩이 아니고, 평범한 로맨스물도 아닌 것 같은데?'
자꾸 영화내용이 떠오르고, 영화에 대해, 등장인물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그 와중에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번뜩하는 게 있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데,
아내에게 말하고 싶은데, 몇 번 운을 떼 보았지만 별 관심이 없고,
심리학자인 매형도 보면 좋아할 것 같은데,
Hello, yung. Did you see movie 'she came to me'? I saw it last day and it was very interesting. Characters show uneasiness...?!?!
한국말로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데 영어로 소통할 생각을 하니 버겁다.
그래서 혼자 생각하고, 혼자 적으며, 감상을 여기 글로 남긴다.
감독은 레베카 밀러. 이 영화는 2023년 베를린 영화제 개막작이었다.
레베카 밀러는 63년생으로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인데, 7개의 영화를 감독(연출) 한 것으로 나온다. - 위키백과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것 같았는데,
<IMDB 6.0/10, 토마토 지수 47%>
점수 역시 그러했다.
로맨스나 기존 영화를 기대하고 봤다면 실망할 법도 하다.
내 생각에 이 영화에서 로맨스의 비중은 한 20% 정도고 코미디의 비중도 한 10% 정도인 것 같다. 현실 반영이다.
그럼에도 로맨스 코미디 장르로 분류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로맨스를 원했든 코미디를 원했든지 실망할 확률이 높다.
나 자신은 이 영화가 나를 돌이켜 보게 되는 계기를 여러 부분 주었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자아성찰을 하게 한 영화다.
호러 영화에서 살인마가 칼 들고 쫓아오면 당연히 무섭다.
로맨스 영화에서 훈남 훈녀가 서로 붙잡고 사랑을 속삭이면 (당연히 멋진 배경에 음악도 깔리고..) 내 심장도 쿵덕댄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해서 새로울 것도 없는데
스티븐 로댐(피터 딩클리지)이 그저 걸어가는 장면을 보는데 내 가슴이 왜 쫄깃했는가. 나는 일단 거기서 한 방 먹었다.
스티븐 로댐은 유능한 작곡가이지만 사람과 만나는 게 불안하고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한다. 하지만 막 등장한 그를 보았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그 짧은 팔다리뿐이었다. 유독 짧은 팔다리로 그는 극 중을 휘젓고 다닌다.
사람과의 대면을 무서워하고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불안해하는 그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걷는 모습은 무척 당당하다.
오히려 관객인 내가, 주변의 누군가 로댐의 팔다리를 의식하고 곁눈질하거나, 들먹이거나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영화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스티븐의 팔다리는 내가 기억하는 한 언급되지 않는다. 나만 의식했다.
스티븐이 파티장을 가로지르는 장면, 시내를 걷는 장면 등은 대단히 일상적인 장면인데도 내게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그냥 걷는 장면일 뿐인데도 조마조마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친절한 카트리나(마리사 토메이)를 나는 처음에 왜 그렇게 무섭게 느꼈는가.
스티븐 로댐이 패트리샤(앤 해서웨이)의 권유로 산책을 하다가 들른 선술집. 거기서 만난 카트리나는 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예인선 선장이라는 흔하지 않은 직업의 여인이라 흥미로웠고, 스티븐을 배에 초대하기까지 한다. 선상에서 도끼에 대한 설명은 배에서의 일상 같으면서도 무언가 위험한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카트리나가 마침내 스티븐에게 수줍은 고백을 했을 때는 무서웠다. 스티븐도 그랬던 것 같다. 도망치려다가, 못 도망치고 결국 카트리나와 짧은 시간을 함께하고 말지만. (산책 전에 스티븐이 패트리샤에게 관계를 요청했지만 정해진 요일이 아니라 거부당하는 씬이 있었는데, 스티븐의 성욕을 카트리나가 해소해 준 셈이다. 왜 스티븐이 더 적극적으로 도망치지 못했는가를 설명하는 걸까?)
하지만 관계 이후 불타는 사랑과 로맨스를 꿈꾸는 카트리나에게 매몰찬 거절 의사를 밝히고 스티븐은 도망치듯 떠난다. 카트리나호를 떠나다가 밧줄에 발이 꼬여 물에 빠지고, 이때 떠오른 악상과 카트리나를 만났을 때의 매혹적이면서도 불안한 느낌과 경험을 토대로 지지부진하던 오페라 제작을 끝맺는다.
이때까지의 카트리나는 무서웠다. 알 수 없는 낯선 이여서였던 것 같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적었다. 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예인선 선장이라는 여성이 갖기 힘든 직업을 가진 터라 거칠고 험한 성격을 지녔으리라는 선입견도 있던 것 같다. 선장이라면 어쨌든 부드럽기보다는 억척스러울 것 같잖아? 어떻게 보면 이후에 밝혀진 대로, 로맨스에 약하고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여인이라는 성격이 더 억지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스티븐은 카트리나를 얼마나 무서워했길래 남자를 유혹해 도끼로 살해하고 먹어버리는 살인마 캐릭터를 만들어 냈을까.
덕분에 오페라는 현대판 스위니 토드라 칭송받고 흥행에 성공했다.
이런 카트리나가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패트리샤를 만나 일의 전말을 공유하고,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부터는 무섭지 않게 된다. 카트리나는 도끼살인마도 아니고 광적인 스토커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 끼어들어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만들었음을 후회하는 상처 주고 상처 입은 보통 사람에 불과했다.
이 일을 계기로 패트리샤는 스티븐과 결별을 결심하고 수녀가 되고자 한다.
(패트리샤와 스티븐은 계기만 있으면 헤어질 수 있는 그런 단계였던 것 같다. 주도권은 패트리샤가 쥐고 있었고 언제든 처분내릴 수 있는 상태였던 듯...)
스티븐은 패트리샤의 아들 줄리앙에게 의붓아버지 역할을 잘해주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는데 곧 해줄 일이 생긴다.
고등학생인 줄리앙과 그의 연인 테레자는 몇 달의 생일 차이로 줄리앙은 법적으로 성인이고, 테레자는 미성년이다.
테레자의 엄마 막달레나는 패트리샤의 집청소 일을 하다가 테레자를 마주치고 테레자와 줄리앙이 사귀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된다.
테레자의 집도 못 사는 집안은 아니다. 양아버지 트레이는 법원 속기사로서 훌륭히 제 직무를 하고 법조계의 인맥도 넓다. 친엄마 막달레나도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청소를 돕는 것이지 궁색한 처지는 아니다. 그래도 차이는 있을 것이다.
오페라를 만들고 우아하게 옷을 입고 심리 치료를 제공하고(패트리샤는 정신과 의사인 듯) 유명인사들과 안면을 트고 하는 스티븐-패트리샤 쪽 집안이 옷차림도 그렇고 더 상류층 같아 보이기는 하니까.
후에 막달레나는 줄리앙의 침대 밑에서 딸 테레자와 줄리앙의 사진을 발견하고 (후에 법적 증거물이 된다.)
고민하다가 이를 남편 트레이에게 보여준다.
트레이는 완고하고 고집이 세며, 테레자에 의하면 결코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내다.
트레이가 이 문제를 법적으로 해석하면서 영화에서 제일 큰 위기가 닥쳐온다.
미성년자인 테레자가 관계를 맺을 때 동의하는 것은 법적 효력이 없기 때문에,
줄리앙은 법적으로 테레자의 동의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트레이에 의하면 테레자를 강간한 셈이 되어 버렸다.
막달레나는 테레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었지만 시민권자가 아니라 트레이에 비해 가정에서 발언권이 약했고
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적었다. 트레이는 이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겠다며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하버드 입학도 가능한 전도유망한 청소년이던 줄리앙은 이 문제로 평생 강간범이라는 딱지를 지게 생겼고,
월반할 정도로 똑똑한 테레자도 자신이 선택한 결정으로 남자친구가 강간범이 되는 상처를 간직하게 될 위기였다.
법대로 처리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바른말 같아 보이지만,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가 휘두르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흉험 한 마음으로 누구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그저 보통의 삶을, 남들과 다름없이 사랑하고 연애했을 뿐인데.
(자영업을 10년 정도 해본 입장에서 공감이 가는 게, 제아무리 정직하게 운영하고 어쩌고 해도 조사가 나오면 걸리고, 털면 털린다.
법을 잘 모르니까 어쩔 수 없다. 털어도 털 먼지 하나 없게 관리할 법무부서가 있으면 가능할까?
다행히 영세한 업장이라 세무조사 같은 걸 받아 본 적은 없지만 받았다면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주변 사람이나 부모님 이야기만 들어봐도 그렇다.
"털 게 없어 보이지만 일단 털러 나온 이상은 실적을 채워야 하니 얼마큼은 내주셔야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총 대신 법을 휘두르는 강도나 진배없지 않은가?)
줄리앙과 테레자는 결혼을 통해 이 위기(트레이의 위협, 고소)를 벗어나려 한다.
16세도 결혼가능한 미국의 주를 찾아 이동해야 했고.
(법이라는 게 절대적이지 않고 주마다 다르다는 게 또 아이러니.)
트레이가 동원할 수 있는 경찰인맥을 피하기 위해 육로가 아닌 다른 탈출 루트가 필요했다.
스티븐 로댐은 줄리앙을 위해 그가 무서워하며 피하던 카트리나를 다시 찾아간다.
카트리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로맨스 중독자인 카트리나는 흔쾌히 두 어린 연인을 위해 배를 몰아준다.
이렇게 하여 이게 무슨 전개인가 어떻게 끝맺으려고 하나 궁금하던 영화의 이야기가 한줄기로 묶여서 주요 인물들이 한 배에 타고,
줄리앙과 테레자는 결혼을 하고, 패트리샤는 원하던 대로 수녀가 되고, 스티븐은 카트리나와 좋은 관계가 되는 걸로
갈등을 해소하고 관객에게 기쁨을 주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해피엔딩이지만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동화의 느낌은 아니다.
줄리안과 테레자에게는 첫 해피엔딩이지만
영화 속 어른인 등장인물들은 지나온 삶에서 이미 이러한 해피엔딩을 겪었고, 파탄이 있었으며, 다시 해피 엔딩을 쫓고 있다.
똑똑한 청년인 그들도 알고 있다. 자신들의 이른 결혼이 통계적으로 잘 유지될 확률이 낮다는 걸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고 잘 지내는 커플들도 있으며,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게 한껏 행복을 향해 달려 볼 것을 다짐한다.
***
인생은 불안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내 감정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그런 주인공들의 불안함을 강조한 것이 오히려 더 일상적이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해피엔딩이라는 게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서면 그때 잠시 뿐의 기쁨이고,
또 다시 밀려오는 파도를 상대해야 하지만 (여기서 come sale away를 반주로 넣으면 좋겠다.)
그렇게 넘고 또 넘어서면서도 불안함 속에 잠시 기쁨을 의지해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닌가?
갈등 많고 불안도 많고 힘든 인생이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말할 수 있겠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출연배우
Peter Dinklage, 스티븐 로댐
Anne Hathaway, 패트리샤
Marisa Tomei, 카트리나
Evan Ellison, 줄리앙
Harlow Jane, 테레자
Joanna Kulig, 막달레나 (테레자 친엄마)
Brian d'Arcy James, 트레이 (테레자 의붓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