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처럼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유치환 시인의 시
<바위>가 떠올랐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이 시와 너무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 들었다.
그래서 이름이 스토너(stoner)였던가... 했다.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책 내용 인용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이 소네트의 의미가 뭐지?" 그가 불쑥 이렇게 묻더니 냉정한 표정으로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에게 아무런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거의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윌버 군?" 윌버 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슈미트 군?" 누군가가 기침을 했다. 슬론은 반짝이는 검은 눈으로 스토너를 바라보았다. "스토너 군, 이 소네트의 의미가 뭐지?"
스토너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스토너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변했다.
졸업 후 스토너는 학교에 남기로 했다.
"네 생각에 꼭 여기 남아서 공부를 해야겠거든 그렇게 해야지. 네 어머니랑 나는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다."
그렇게 스토너는 부모의 곁을 떠나 자신의 인생을 살게 된다.
매스터스는 예리한 말솜씨와 부드러운 눈을 지닌 가무잡잡한 청년이었다.
고든 핀치는 덩치 큰 금발 청년이었으며, 아직 스물세 살인데도 벌써 살이 찌고 있었다.
전쟁(세계 대전, 1차)이 발발했고, 핀치와 매스터스는 입대했다. 스토너는 학교에 남기로 택했다. 시류를 거스르는 선택을 하기가 오히려 힘들 수도 있는 법이었다. 매스터스는 전쟁 중에 죽었다.
스토너는 박사 학위를 받았고 전임강사가 되었다. 아처 슬론에게서 2학년 영문학 개론 강의를 물려받는다. 스토너를 변화시켰던 수업.
<키가 크고, 깡마르고, 구부정한 소년의 모습으로 자신을 지금의 이 길로 이끌어준 강의에 귀를 기울이던 바로 그 강의실에서 키가 크고, 깡마르고, 구부정한 남자의 모습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문리대 학장 조시아 클레어몬트가 초청한 리셉션에서 스토너는 이디스를 만난다.
<그가 문을 여는 바람에 새어나온, 사람들이 느릿느릿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순간적으로 확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지만, 곧 그의 귀가 그 소리에 익숙해졌다.>
<여러 사람이 식탁 주위에 모여 있었는데, 상석에는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물결무늬가 있는 파란색 비단 드레스 차림으로 서서 금테를 두른 도자기 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스토너는 그 젊은 여성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문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갸름하고 섬세한 얼굴로 주위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씬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보이는 손가락이 능숙하게 찻주전자와 잔을 다뤘다.>
<이디스는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더 약해 보였다. 얼굴은 갸름했고, 입술은 계속 꼭 다물린 채 다소 강해 보이는 이를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몹시 커다란 그 눈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연한 파란색이었다.>
"정말 뛰어난 아이예요." 보스트윅 부인이 말했다. "감수성이 얼마나 예민한지 몰라요." 그녀의 얼굴에 난 주름이 더욱 깊어지고, 목소리에서는 묵은 앙심이 드러났다. "어떤 남자도...... 누구도 그 섬세함을 이해하지 못할 거에요......"
"당신의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요, 윌리엄." 그녀가 말했다. "노력할 거예요."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
이렇게 스토너의 인생은 결혼 초부터 삐걱거리며 시작된다.
이 책의 감상을 적으려고 몇 번인가 시도하다 말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의, 그 강렬한 감동을 전하고 싶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스토너의 삶이 왜 그토록 내 마음을 울렸는지, 느낀 대로 끄적여 보았지만 맘에 들지 않았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며칠 전 아내와 말다툼을 벌였다.
사소한 이유였다. 말투와 어조에서 서로를 찌르는 칼을 느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시를 세웠다. 한두번도 아니고 간혹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더라.
"그렇게 머리 복잡하게 살면 피곤하겠다."
아내의 말에 상처 받은게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느낀 것,
'그동안 내가 이해받기를 포기하고 살고 있었구나' 하고 느꼈기 때문이다.
단지 집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만사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받기를 포기하고 살아온 나 자신의 삶이 서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가 얼마나 절실히 이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도 느꼈다. 거절당할까 두렵거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이해받지 못하는 게 힘들어서 아예 이해받으려는 시도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이해받기를 포기하면, 말수가 줄어든다. 머릿속에 더 좋은 생각이 들어도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하려 한다. 속 깊은 곳의 이야기는 웬만하면 꺼내지 않는다. 말은 줄어들고, 행동은 로봇처럼 변하고, 그렇게 바위가 되어 간다.
스토너를 읽고 느낀 감동과 전율은, 내 안의 많은 부분이 이미 스토너처럼, 바위처럼 굳어져 경화되어 가고 있기에 그가 이해 가면서도 안쓰럽고, 또 존경스러웠기 때문이 아닐까.
고난과 역경 속에 살면서도 바위처럼 소나무처럼, 소리내지 않고 신음하지 않으며 삶을 버텨냈던 사람, 스토너. 그 사람의 인생을 바위처럼 담담한 필체로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바위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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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써온 감상 기록을 마무리하려다가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스토너는 온전히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았다.
(스토너로서 선택하고, 스토너로서 행동하고,)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태생이 바위를 닮은 사람이다. 하지만 머리는 명민하여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주변사람들의 의도와 행동의 동기도 다 안다. 그들이 자기자신의 숨은 동기를 모르고 고약한 심술을 부릴 때도 스토너는 알고 있다. 알지만 그런 행동들에 스토너는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스토너의 타고난 본성이었고, 스토너다운 것이었다.
나다운 것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이런 질문에 스토너는 답을 가지고 살았다.
(I'm Stoner)
결혼, 직장, 자녀, 사랑, 성취. 스토너가 겪은 인생의 고난은 우리 모두가 겪는 고난이다.
그런 인생에 대해 어떤 답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토너는 스토너스럽게 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스토너가 겪는 삶의 고난은 우리 모두의 고난이기에 감정이 이입되고 가슴 아팠고 함께 힘들었다.
스토너는 자기 인생에 대해 답을 했다. 있는 그대로 자신으로 살았다. 그래서 존경스럽다.
바위처럼 단단하거나, 어떤 업적을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존경스럽다.
생의 말미에 스토너는 자신이 아내 이디스의 기대에 조금 더 부응했더라면, 전혀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죽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지금의 나로서는, 나답지 못한 행동 한 것들을 후회할 것 같다.
그래서 나다운 게 뭔지, 어떤 게 나다운 것인지 생각을 많이 하고, 행동하고 판단할 때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이다.
<우선은 나 자신으로 살 것, 그 다음 여력 있으면 남의 기대에 부응할 것.>
-스토너처럼.
스토너를 읽은 감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