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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May 17. 2024

방학 6일 차

2024. 02. 13.

석면공사를 이유로 약 2달간의 여름방학을 보냈다.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지만ㅡ실제 거의 한 달간 유럽여행을 간 동료도 있었다ㅡ발목 인대 파열로 2달간 병상에 있었던 나는 조금 무료함을 느꼈다. 그리고 9월에는 밀려드는 공문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만 했고, 거의 근무나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가다 9월 중순에 개학하였다.


보통의 학교들과 약 한 달간의 차이가 있었고, 진도가 너무 늦다 싶다가도 '한 달 여유 있으니 괜찮ㅇㅇ'을 몇 차례 되새겼다. 겨울이 유독 추운 학교라 오가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학년 말이라 보고할 것, 갈무리할 일도 참 많았다. 정신을 거의 놓을락 말락, 거의 기어서 퇴근하는 생활을 몇 주 하다가 지난 2월 7일 드디어 종업을 했다.


<'2달 여방과 방 없음'이 남긴 명언>  

     남들이 방학할 때 같이 해야 한다   

     겨울방학이 긴 자가 진정한 승자   


2월 7일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날이다. 이렇게까지 기다린 적이 없는 종업식, 누군가에게는 해방의 날, 그리고 올해가 만기 근무인 나에게는 송별회의 날이었다. 5년간 쌓인ㅡ미쳐 버리지 못했던ㅡ잡동사니들을 학생들에게 선물인 척 나누어주고, 끝나지 않은 방과후학교 업무와, 새로 벌린 일들과, 나머지 서류 정리를 하며 오후를 보냈다.


나는 올해 친목회 총무였고, 송별회 꽃다발을 내가 직접 샀다. 이제는 거의 모든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나는 꽃다발을 주문·결재하고 찾아오면서도 별다른 감정을 갖지 않았다. 종업식 날 아침, 꽃다발을 수령하여 학교로 출근하는 차 안에서 부장님의 '학교를 떠나는 소감이 어떠냐'라는 물음에도 '정말 아무렇지 않다. 그냥 빨리 가고 싶고, 홀가분하다. 무사히 가는 게 목표다'라는 무미건조한 답변을 했다.


나를 포함해 네 사람이 이동하기 때문에 송별회 느낌이 낭랑했다. 고깃집에서 테이블 8개를 잡고, 초반에는 관리자분들 곁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지난날에 대한 소회와 앞으로의 결의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가며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말 재미있는 피드백, '선생님, 이렇게 재미있게 말씀하는 분인 줄 이제야 알았어요'.


5년간 계속 바빴는데,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바빴다. 교무실에 가서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물 뜨러 가면서, 인쇄물 가지러 가면서, 파쇄하러 가면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하는 게 전부였던 사람들. 일적으로 가 아니면 먼저 가서 말 걸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동안 왠지 받기만 한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숙연해졌던 게 사실, 그리고 참 아쉬웠다.


그래도 지난 5년을 이보다 더 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보냈다.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나에게 귀감이 되었고 아는 것, 할 줄 아는 것, 보이는 것이 많아졌다. 좋은 사람들 곁에서 나 또한 인간적으로 성숙하며 선순환의 좋은 예를 몸소 경험하였다. '이전 학교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보내며 많이 배웠다는 느낌을 갖도록 다음 학교에서도 열심히 하겠다'라는, 정말 즉석에서 생각해 낸 오글거리는 멘트로 송별사를 마무리했던ㅡ


2차, 3차는 선생님들끼리 오붓하게 자리를 가졌다. 2023 내 최고의 파트너 K도 참석해서 나는 너무 기뻤다지! 너무너무 즐거웠다. 너무너무너무 즐거웠다. 나이답지 않게 꼰대스러운 면이 있는 동기 M이 술을 거듭 권해도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이제는 자주 들어서 나마저도 인정하게 된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나, 정말 감사하다.


이날은 날씨가 정말 추웠고 차가운 맥주를 연거푸 마신 데다가 찬 새벽 공기를 마신 탓에 결국 감기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술병은 덤... 다음날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오전 일정을 소화하고 교육지원청에 출장을 갔다. 열심히 협의하고 작은 설날 전야제를 시작으로 4일간의 설 연휴를 보냈다. 사람들과 함께 시간 보내고, 또 나름의 의무를 하느라 방학 다운 방학을 보내진 못했는데, 연휴 마지막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를 짜내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냈다.


그리하여 오늘 2월 13일은 방학 6일 차. 2월 17일까지 완수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29일까지 미뤄졌다.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이라 미리 하면 오죽 좋겠냐만,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닌 나에게 구태여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 여유롭게 지난 일을 회상하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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