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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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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Oct 05. 2024

산이 부른다

서양식 구도 영화

힐링 영화인 줄 알았다. 포스터에 '나는 오늘 출근하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어서 일상에 지친 직장인 주인공이 산으로 여행을 떠나 자연 속에서 휴식하는 내용을 예상했다. 요즘 집에만 있어서 답답했기에 이 영화를 고른 건데 중반부터 내 예상은 어긋났고 이게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성장을 다룬, 꽤 심오한 영화임을 깨달았다. 장엄한 설산의 이미지가 계속되는 중에 느닷없이 도깨비불 같은 게 등장하고 주인공이 히어로처럼 '빛나는 팔'을 얻는데, 반전 영화 보듯이 놀라고 갑자기 흥미진진함을 느낀 건 재밌는 경험이었다.


두괄식으로 주제부터 말하자면, 한 인간이 바쁜 일상에서 자아를 잃고 살다 우연히 자연(산)을 접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경험해 더 나은 자아로 성장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부한 구도 여정 같고 십우도를 차용한 게 보이지만 그걸 서양의 이미지로 재해석하듯 표현했다는 게 이 영화의 장점이다.

주인공 피에르의 등산과 하산을 십우도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기계 팔'을 시연하다 창밖의 몽블랑 산에 매혹되고, 술집 거리에서 혼자 사슴을 발견하여 결국 직장으로 복귀하지 않고 산에 오르는 것은 심우(尋牛)다. 아직 소 같은 뚜렷한 대상은 없지만 산의 뭔가에 홀려 여정을 시작했으니 구도의 첫 단계라 볼 수 있다. 산의 봉우리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쪽을 탐험한 것은 견적(見跡)이다. 소의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뜻인데, 피에르가 조사하는 낙석 현상은 나중에 '움직이는 용암(소)'이 발생시킨 결과라는 게 드러난다. 즉, 낙석은 '움직이는 용암'의 발자국인 셈이다. 피에르는 관객마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난데없이 주황빛이 나타나 산을 오르는 것의 정체인,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움직이는 돌덩이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쫓아 산 중턱의 동굴에 들어가 그 '움직이는 용암'과 교접하고 '빛나는 팔'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득우(得牛)와 목우(牧牛)와 귀우귀가(騎牛歸家)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소의 고삐를 붙잡고 소를 기르고 그것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과정은 영화에서 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는 '움직이는 용암'을 몸속으로 지녀 자신의 팔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것과 흡사하다. 소를 자기 소유물로 만든 것은 '빛나는 팔'을 가지게 된 것과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망우존인(忘牛存人)과 인우구망(人牛俱妄)은 도의 궁극적 경지로서 소와 자기 자신마저 잊은 무아 혹은 무위의 상태를 뜻한다. 피에르는 '빛나는 팔'에 만족하지 않고 '움직이는 용암'을 따라 빙하 속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기존의 자아를 잃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신기한 체험을 한다. 원래 물속에서 호흡하지 못하는 인간이 아가미가 갑자기 달린 것도 아닌데 물의 분자 구조와 비슷한 존재가 되어 유영한다. 도의 수단(소)과 도를 구하는 주체까지 사라져버려 자연 그 자체가 된 상태가 물속의 피에르인 것이다. 재밌는 건 그가 그렇게 궁극의 경지에 빠져 있을 때 현실의 레아는 강에서 조심스럽게 카누를 타고, 그녀가 있는 실내의 창밖에서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강과 비의 이미지는 피에르가 합일한 빙하 속 물을 연상시키고, 그렇게 물은 이 세계에서 형태를 바꾸며 순환함을 나타낸다. 태양에 의해 증발한 강물이 하늘에서 응축되어 구름이 되고 그것이 지상에 떨어져 빙하나 강물이 된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또 계속 순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피에르가 산에서 '움직이는 용암'을 만나 '빛나는 팔'을 얻고 빙하 속에서 물과 합일하여 체험한 깨달음이다. '움직이는 용암'도 지하에서 올라와 산을 타고 중턱까지 간 다음 그곳 빙하에 들어가 물이 되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빙하와 함께 녹아 증발된 후 비로 지상에 떨어져 자신의 고향인 지하로 흘러내릴 것이다. 용암이었다 물이 되고 물이었다 다시 용암이 되는, 그리고 지하에 있다가 지상을 거쳐 산에 도달하고 지하로 돌아가는 이 순환의 여정은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 반본환원(返本還源)과 입전수수(入廛垂手)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피에르의 빙하 속 상태에서, 그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거나 우리 삶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끝났다면 미완성의 철학으로서 찝찝함과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수직적 구조에서 위로 상승하여 새로운 단계가 되는 것은 완전한 철학이 아니다. '빛나는 팔'로 빙하에 들어간 피에르가 영원히 물의 상태로 남는다면 이 세상은 순환 없이 단 한 번으로 끝나는 원리가 되고 만다. 그럼 시시해지는 것이다. '움직이는 용암' 입장에서도 결국 산 중턱까지 올라 빙하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수영만 한다면 돌고 도는 자연의 이치에 위배되어 아무 목적 없이 곧 끝나게 되는 것이다. 빙하는 언젠가 녹고 그게 비가 되어 내리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물의 상태도 한 번으로 끝인 게 된다. 순환이 없으면 이 세상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물속의 피에르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그를 찾는 레아의 외침이다. 피에르는 물속에 진동처럼 전달된,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를 듣고 빙하에서 나가야 함을 느낀다. 산의 휴게소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그녀를, 그는 어느새 사랑하고 있었다. 신발 끈을 매주고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다 준 그녀는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엄마의 존재를 상징한다. (그녀의 직업이, 먹이는 요리사라는 것도 특기할 만한 점.) 실제로 그녀는 극 중에서 처녀가 아니라 한 아이를 돌보는 엄마다. 그렇다면 피에르가 빙하 속에 들어가 유영한 것은 무어라 할 수 있을까? 태아가 자궁 속 양수에서 논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산의 빙하는 우리가 태어났던 엄마 배 속인 것이다. 거기서 생명이 태어나고 산을 내려가 사람들과 섞여 산 뒤, '움직이는 용암'이 산을 올라 빙하로 돌아가는 것처럼 남녀의 사랑에서 새 생명이 탄생을 준비한다. 피에르가 산을 오르기 전 술집 거리를 떠돌다 사슴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는데, 산 밑의 그곳 거리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짝을 찾기 위해 놀고 있다. 이건 사랑을 통해 생명을 순환시키려는 우리 삶에 대한 묘사다.

레아의 목소리를 듣고 빙하 속에서 나온 피에르는 알몸이다. 마치 태아가 몸을 웅크리고 있듯이 그도 그런 자세를 하고 나온다. 새로 태어난 그는 엄마의 역할을 상징하는 레아에 의해 구조되고 그녀의 보금자리인 식당에서 휴식을 취한 뒤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키스하고 애무하는 시점부터 레아는 엄마가 아니라 연인을 상징하게 된다. 남자 입장에서 보면(더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이 남자이므로) 여자란 종합적인 측면에서 나를 낳아주고 나와 사랑하는 대상의 총합이기 때문에 레아가 두 역할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이다. 피에르의 '빛나는 팔'을 무드 등으로 삼아 뜨거운 밤을 보낸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에 헤어진다. 하산을 계획한 피에르는 자연(산)에서 사회로 돌아가 퇴사 처리, 구직 활동, 가족 만남 같은, 정리할 일이 있었을 것이다. '빛나는 팔'을 획득한 채 산을 내려가는 그는 산을 올랐을 때인 이전의 그가 아니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지만 '빛나는 팔'을 가졌고 빙하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새로운 피에르인 것이다. 마지막에 그가 세상을 향해 내려가는 모습은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진 각자(覺者)의 초연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속적으로나 고답적으로나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등산의 그와 하산의 그는 물론 다르지만 영화의 주제는 개인의 발전보다 자연의 섭리를 표현하는 데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피에르는 레아와 작별할 때 다시 오겠다고 말한다. 연인이니까 또 보러 오겠다는 뜻이지만 주제의 측면에서 해석하면 이 영화의 테마인 '순환'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피에르는 결국 아니, 그가 대표하는 남자란 존재는 또 산에 와 새롭게 탄생할 것이고 레아가 대표하는 여자란 존재는 또 그를 돌보고(엄마의 역할) 사랑해줄 것이다(연인의 역할). 여러 나라를 떠돌다 결국 자신이 자랐던 몽블랑 지역으로 돌아와 정착했다는 레아의 말은 역시 '순환'의 측면에서 매우 유의미하다. 그녀의 어린 아들은 음악 플레이어로 무얼 듣느냐는 피에르의 물음에 새 소리를 듣는다고 답하는데, 이건 그가 피에르가 산에 매료되어 떠났듯이 언젠가 새 소리를 탐구하기 위해 숲으로 갈 것임을 예고하는 단서다. 피에르와 그 어린 친구는 둘 다 남자고, 결국 그들은 자연(산과 숲)으로 돌아가 탄생을 반복한다. 레아의 아들도 피에르가 산에서 레아를 만난 것처럼 숲에서 어떤 여자를 만날 것이다. 그 여자 또한 레아가 피에르에게 했던 것처럼 레아의 아들을 돌보고 사랑해줄 것이고.


피에르가 산에 끌린 이유는 자신의 삶이 단조롭고 갑갑했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와 미팅 한 자리에서, 팔아야 하는 '기계 팔'을 소개하다 피에르는 창밖의 산을 보고 홀린 듯 잠시 가만있는다. 그의 삶은 영화 처음 장면에 어떠한지 드러난다. 주방의 커피 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는 피에르. 그의 주변을 차가운 느낌의 철제 가구가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차가운' 느낌이란 몽블랑 산의 차가움과는 다른 것이다. 전자는 무정함에 가깝고 후자는 시원함에 가깝다.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얽매여 기계처럼 움직이는 인간 사회의 모습과,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홀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자연의 모습을 비교해보자. 출근길의 피에르는 시끄러운 도심을 걷고 빽빽한 좌석의 열차에 앉아 업무 자료를 본다. 그가 미팅 자리에서 소개한 '기계 팔'은 자기 삶에 대한 은유다. 그 팔은 나름 똑똑해서 사용자가 지정한 동작을 학습하지만 그 움직임은 자기 의지에 따른 자유의 동작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용자가 그렇게 움직이라고 명령한 결과에 불과하다. 생계를 위해서 직장 사장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그리고 피에르의 형이 해고 당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고 흥분해서 다그친 것처럼 직장을 벗어나서는 스스로 살 수도 없는 현대인의 초상이 즉 '기계 팔'인 것이다. 산에서 그저 떨어지는 게 아니라 같은 돌 모양을 하고 있지만 목표(빙하)를 향해 스스로 움직이는 용암을 보고 피에르가 홀린 듯 따라간 것도 지금까지 얘기한 맥락과 같다. 자연에서 자기 의지를 갖고 산을 오르는 모습에 피에르는 어떤 동경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 이것이다! 이게 내가 추구하는 삶이다! 그 '움직이는 용암'이 피에르와 교접하여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빛나는 팔'이다. 그래서 '기계 팔'과 '빛나는 팔'은 서로 대비된다.


다쳐서 구조된 피에르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가 낙석 현상의 원인이 빙하가 녹는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움직이는 용암'을 목격한 피에르는 의사가 혹시나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질문을 하려다가 관둔다. 현대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의사가 낙석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그 떨어지는 돌과 다르게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는 돌이 있음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상의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산 중턱의 '움직이는 용암'이 빙하에 들어가 그것을 녹이고 물의 존재로서 순환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현대 사회의 지식은 굉장히 피상적일 수 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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