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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n 11. 2024

매실주를 담그며

나의 결혼생활. 9

쌈채소와 청매실이 풍성하니 따가라는 연락을 받고, 아내와 함께 지인이 살고 있는 교외로 차를 달렸다. 200평 가까운 밭에 각종 쌈채소와 부추, 딸기, 오이, 호박 등이 풍성하게 열려 수확의 재미에 시간 가는 모르고 따다보니 바구니가 차버렸다.


뒷마당에 한그루 남은 청매실 나무에도 청매실이 주렁주렁 열려, 매실나무 아래 부추밭에 낙과도 많이 생겼다. 30분도 안되어 실한 청매실 바구니가 가득 찼다.

(쌈채소도, 청매실도 모두 풍성하게 열렸다)

우리집 식구는 몇 년전 제주도에 갔다가 매실하이볼을 한잔 마시고 홀딱 반한 적이 있다. 집에 돌아와 매실이 나는 때를 기다려 온라인으로 황매실을 주문해 매실주를 담궜다. 눈으로, 코로, 입으로 마시기에는 황매실이 청매실보다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황매실로 한 것이다.

그리고 100일이 지나서, 제주도에서 맛 본 매실 하이볼을 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황매실 한가지만 넣고도 이렇게 맛있는 술을 만들 수 있다니 술의 신세계였다. 모임에 들고 가서 자랑을 하며 나눠 마시고, 집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먹다보니 담금주 2병, 10리터가 생각보다 얼마 안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도 황매실주가 집에 있는 동안,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술 마시는 것보다, 집에서 마실 매실 하이볼을 기대하며 퇴근시간이 앞당겨졌으니 황매실주는 돈 값을 제대로 한 셈이다.

(재작년엔 온라인으로 황매실을 주문해 황매실주를 담궈, 매실하이볼을 만들어 마셨다)

지인의 집에서 수확한 매실 한바구니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청매실주와 매실 엑기스를 만들기로 했다.

수확한 청매실을 깨끗이 씻어 말린 다음, 꼭지를 하나씩 땄다. 꼭지를 따는 이유를 찾아보니 그대로 두고 술이나 청을 담을 경우 쓴맛이 난다고 하는데, 지저분한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지를 따기 전 우선 청매실주를 담을 병을 소독해 말렸다.

(병을 소독하고, 매실 꼭지를 땄다)

소독한 병을 옆에 두고, 혼자 하기에 산더미 같은 청매실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내가 시장통의 방망이 는 노인은 아니지만, 이쑤시개로 하다가 바늘로 하다가 잘못하면 상처날까 걱정하며 섬세하게 꼭지 따는 작업을 이어갔다.

노래를 들으며 혼자 한참을 해도 줄지않는 매실 바구니를 한탄하는데, 낮잠을 자다 깬 아내가 붙으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아내가 이끌며 이건 버리고, 이것도 버리고, 이건 통과 그렇게 속도를 내자 오래 걸릴까 싶던 일이 30분만에 끝나 버렸다.

 

황매실의 향을 기억하는 우리는, 청매실로 술을 담궜을 때 과연 그 향과 맛이 날까 걱정됐다. 그래서 청매실로 술을 담그는 이번엔 감초를 넣기로 했다. 매실주에 감초를 넣으면 단맛이 늘어난다팁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절반은 술을 담그고, 절반은 갈색설탕과 매실을 1:1 비율로 매실청을 담궜다.

청매실주를 담그고, 하루만에 청매실의 색깔이 변했다.

하루가 지나고 보니 벌써 청매실주 속의 매실 색깔이 변했다.

담금술은 100일 뒀다가 마시라고 하는데, 100일이 지난 후에는 매실과 술을 따로 분리해 천천히 아껴 먹어볼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면 절로 깊어지는 매실주의 향과 맛처럼 우리 인생도 시간에 따라 절로 깊어지고 성숙해졌으면 좋겠는데,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만 되지 않는게 사는 것이니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무기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부디 남은 올해는 지인의 풍성한 밭처럼 풍성한 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루만에 갑자기 변해버린 청매실의 색깔처럼, 올해의 남은 날중 어떤 날은 눈 떠보니 좋은 일이 생겼네 하는 갑작스런 그런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떨어진 매실 몇 개를 종량제 봉투에 넣었더니 종량제 봉투를 열 때마다 향긋한 냄새가 난다. 종량제 봉투 안에서도 매실은 잘도 익어가는구나.




제가 쓰고 있는 브런치북과 매거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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