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을라 Jul 15. 2024

씨줄과 날줄로서의 철학ㆍ사회과학

자아(Ego) 발견의 두 수단: 실험(test)ㆍ도락(rest)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양을라입니다. 제 본명은 따로 있습니다만, 이 필명은 몇몇 사람들에게 곧잘 불립니다.


    저는 1991년생에 태어난 남자입니다. 성균관에서 행정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MBA에서 경영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인문학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특히 철학입니다. 10대 때에는 사마천의 〈사기〉를 거듭 읽었네요.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에는, 교과서에 실린 괴테의 〈파우스트〉 단편선을 읽고, 머리가 쾅 울리는 충격을 받았어요.


    단순히 이렇게 말해서는 그때의 느낌을 온전히 전하기 어렵겠네요. ‘책으로부터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나의 영혼이 저 뒤로 한참 날아가는 느낌.’ 영적 체험이라도 한 듯 식은땀이 벌벌 나고야 말았습니다. 타고나기를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저는, 결국 수업 중에 담을 넘어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고, 교보문고로 달려가 민음사에서 출판된 그 책 2권을 사 읽었습니다.


    지금은? 문학과 철학 공부는 쉬게 되었어요. 지금은 컴퓨터와 경영, 특히 금융공학을 공부하고 있답니다. 이것들도 대단히 흥미로운 분야여서, 교과서나 논문을 읽다 보면 하루에도 두세 번 웃음이 터지곤 합니다. 특히 요즈음에는 기업의 퇴폐 성문화(Corporate Sex Culture)나 비리 연구(Corporate Corruption Study)를 실제 사례들을 직접 취해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슴 한 편에는 여태까지 내가 배워 온 것들을 추려내면서, 내가 느꼈고 획득했던 사상들도 정리하고픈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여기 이 브런치에 실릴 대부분의 글들로, 〈씨줄과 날줄로서의 철학ㆍ사회과학(Philosophie et Sciences Sociales comme Trame et Chaîne)〉이 될 것이에요.


    기본적으로는 독자들 아랑곳 않고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쓰겠습니다. 그런데 쉽게 쓰겠습니다. 중학생 분들도 이해할 수 있게끔. 특히 경영학이나 행정학 같은 관리과학(Management)에 대해서는 제가 배웠거나 배우는 내용들을 묶어 잘 정리해 올리려 합니다.




자아(Ego) 발견의 두 수단: 실험ㆍ도락


    이 이야기의 체계가, 저의 개인적인 사상으로 시작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제 글을 문장에 드러나는 개성과, 그로 인한 특정 문장의 고립성 문제, 그에 대한 당위를 우선 설명하려 합니다.     


    실험정신과 도락심은 인간에게 주어진 값비싼 마음 중 하나입니다. 그 욕구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져도 좋고, 어느 새벽 외딴 방에서 고독하게 이루어져도 또 좋습니다. 여기서 위대함이나 우연한 영감(intuition)이 싹트는 일도 심심치 않습니다.


    아래에서부터는 더 짧게, 「실험(實驗, test)」「도락(道樂, rest)」이라 불러 보겠습니다.     


    석가는 성문 바깥에서 진리로 이르는 출발점을 찾았고, 아이작 뉴턴은 떨어진 사과에서 만유인력을 깨달았습니다. 괴테의 시를 본 슈베르트가 〈마왕(Erlkönig)〉을 만들었고, 역사학도 출신의 칼럼니스트였던 에드워드 위튼(Edward Witten, 1951~)은 자신만의 ‘전향’으로 천재적인 물리학자로 변신, 초끈이론을 발전시킵니다.     


    하지만, 실험과 도락이 위처럼 인류사의 구루들에게만 허락된 것은 아닙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창작 활동은 사람 누구에게나 주어진 욕구일 것입니다. 인간 저마다에는 도저히 중복되지 않는 개성(individuality)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성이 힘입는 사회일수록 세계가 갖는 가능성의 갈레가 많아질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인들의 실험들은 새로운 양분을 찾는 풀뿌리처럼 사회 내면을 더듬어 나가고, 가끔은 아주 신비로운 곳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비일상적인 아이디어들이 도로 우리에게 돌아와 삶을 풍족하게 되는 근원적인 것들로 자리합니다. 주변을 둘러봅시다. 거울, 포도주, 바퀴, 컵, 전지(battery)… 모두 원시의 우리에겐 없었던 것들이지요. 


    이렇게 개성이 갖는 힘을 조정하는 것은 자동차의 페달을 밟는 과정과 사뭇 비슷합니다. 실험은 페달을 지르밟는 일, 도락은 거기서 발을 떼어내는 일입니다. 


    반면, 개성이 힘입지 못 하는 사회의 부작용은 보통 획일화로 나타납니다. ‘둥글둥글한 나’를 표현하기 위해 두꺼운 페르소나를 만들어 쓰고, 가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합니다. 내 친구들이 한다는 것을 나만 하지 않게 되면 왜인지 불안합니다.


    무언가 바쁘게는 살아 왔는데, 40ㆍ50대 장년이 되어서야 문득 느끼는 목적의 상실감,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더듬어 보지만 떠밀리듯 차지하게 된 사회적 지위나 저물어 버린 체력은 좀처럼 여유를 주지 않겠지요. 주위를 돌아보니 내 친구들 중에는 꽤 성공한 이들도 있어, 나도 운이 좋았다면 이들만큼은 하지 않았을까 행복한 가정법을 세워 보기도 합니다. 함부로 어린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자신의 친구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그들이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 무의미하게 뽐내 보기도 할 것입니다. 내 친구들의 지위에 따라, 나의 왕년을 읊어 보자니, 덩달아 내 입장도 올라간 것 같겠네요.


    이렇게 때문에 본인이 직접 창조할 수 있었을 많은 아름다운 가능성들을 ‘정선된 소수(the selected few)’들에게 맡겨 버리고, 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소식을 듣게 되는 상태에 놓입니다. ‘정선된 소수’에 이르지 못 한 대중의 자아는 대개 막연해집니다. 나는 정선된 소수가 아니라는 열패감. 어차피 삶의 대부분이 유전자나 집안에 의해 결정된다며, ‘노력’ 자체가 갖는 가치를 폄하해 보기도 합니다.


    엘리트들이 나와는 다른 집단이라는 의식도 자연히 생겨납니다. 나의 정체성을 나에게서 찾지 못 하고, 사회 바깥으로부터 갖가지 잣대를 빌려 와 손쉽게 소거해 나가려 합니다. 남성인가, 여성인가. 명문대를 졸업하였는가, 아닌가. 대기업에 재직 중인가, 아닌가. 월 소득은 얼마인가…. 이렇게 연거푸 반복한 소거법의 끝에 남는 것이 ‘나(我)’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것은 에너지 낭비입니다. 게다가 이런 낭비의 결말은 고갈이고, 곧 무의미한 자기위로나 비관주의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아름다운 삶의 시작은 자아의 탐구에서 시작합니다. 그것도, 가능한 빠른 자아의 탐구. 이것만이 우리가 어두운 회색지대에서 벗어나, 세계의 중심과 주인공의 자리로 천천히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주인공(protagonist)’ 개념에 대해서는 불교철학과 헤겔의 철학을 빌려, 나중의 기회에 글을 쓰겠습니다.)




작가를 위한 작은 변명


    사실 대부분의 개념은 인류사의 천재들이 우리들보다 앞서 정리를 해 놓았고, 아마 해 놓았을 겁니다. 제가 위에서 ‘실험(test)’이니, ‘도락(rest)’이니 한 개념도 (더욱 나아가면 다른 부분이 있겠습니다만) 결국 동양의 지혜인 〈중용(中庸)〉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가인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또한 그의 저서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1985)〉에서 “(서양) 철학은 결국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표현했지요. 


    그런데, 원래 지혜란 것이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서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논의 위에서 덧대어 나가는 것, 더 나은 것을 찾아내고자 궁리하는 것이 지혜를 찾아 나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앞서 자아를 튼튼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높은 산을 정복하려거나, 먼 길을 나서려 할 때에 앞서 튼튼한 몸과 알맞은 채비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지요.


    저는 위 목적을 위해서 이 글의 체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눌 이야기가 많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역사부터, 공자ㆍ맹자와 같은 이야기. 에드문트 후설의 주창이나,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 마르틴 하이데거의 〈동일성과 차이성〉,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뮐라씨옹〉까지 포함할 것입니다.


    철학이 사회와 거리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우스꽝스럽고 엽기적인 일들도 사례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런 이론들이 어떻게 개인의 창조 활동에 사용될 수 있는지, 실제 제가 대학원 생활 중 제시할 사회학적 모델이며 가설 등의 구체화 과정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은 정답이 아닙니다. 자아를 찾아 손 뻗어 나가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더 쉽게는, 실뜨기 놀이와 본질적으론 같겠습니다. 한 올 한 올의 좁은 국면만 들여다보면 이것이 장차 어떤 옷가지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각자의 개성과 배경에 따라 매듭들은 목적을 향해 켜켜이 묶여 갑니다. 


    과정은 철학가들마다 달랐어요. 철학이 유일무이한 진리고, 단일한 정해(正解)였다면 여러 종류의 철학이 존재할 필요도, 철학가들끼리의 대립도 없었겠지요.


    다음 글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글이 될 것입니다. 철학 및 사회과학의 첫 출발인 선악론(善惡論)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인간 본성은 과연 어떨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